눈 쌓인 숲속에 까만 밤이 밀려왔다. 횃불을 든 밀렵꾼 무리가 숨죽이며 산비탈을 올랐다. 개중 지친 이들은 혀를 찼다. 요괴한테 홀려서 미쳤다지? 공부를 오래 해 그리 됐나? 엄동설한에 이죽대는 소리가 입김처럼 퍼졌다. 저열한 웃음이 땅에 흩어졌다.

 

 

 

요괴 하나에 온 나라가 들썩인 겨울이었다. 잡겠다고 조정에서 포상까지 내걸었다. 범을 사냥하는 것만큼이나 대대적인 수색이 삼 일 내리 이어졌다. 쉬지 않고 산을 타기엔 날이 험했고 수확 없이 배를 곯자 이탈자가 속출했다.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진 이상 오늘은 반드시 포획해야 한다고, 무리의 대장 김씨는 생각했다.

 

 

 

수풀 사이로 무엇인가 인기척을 낸 것은 그때였다. 김씨가 상체를 낮게 숙였다. 덩달아 포복 자세를 취한 시선들이 물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스물을 갓 넘겼을까. 밀을 빻아 지은 듯 고운 얼굴의 소년은 수풀을 헤치고 아찔한 절벽 앞으로 걸어갔다. 김씨가 손을 까딱이자 일제히 그를 향해 화살을 겨누던 순간. 등 뒤에서 벌어진 상황을 모르는 모양인지, 소년이 커다랗게 고함치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죽으면 넌 살 수 있어. 널 찾지 못할 테니 멀리, 명으로 가. 그리고… 다신 여기 오지 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초조했다. 소년은 일찌감치 이 사랑이 잘못 됐다는 걸 알았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사랑. 후환이 담을 넘고 저주가 뿌리 내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 했기에, 스스로 벼랑 위에 섰다.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삶에 대한 미련이 모래처럼 와르르 빠져나갔다.

 

 

 

‘가, 가 제발….’

 

 

 

그가 손을 내젓던 순간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뻗는 듯 하더니, 사방으로 피가 튀겼다. 화살이 정확히 소년의 심장에 꽂혀들었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에 무릎이 꺾였다. 짐짓 눈물이 일었다. 자꾸 어디론가 굴러가는 초점을 붙잡고, 자신을 애타게 끌어안는 이를 밀어냈다.

 

 

 

‘가라고….’

 

‘내가 어딜 가, 나 버리지 마…….’

 

 

 

피 묻은 손을 마주 잡고 뺨을 붙여오는 이의 이름은 장장.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었던, 사육 불가의 요괴.

 

 

 

‘가라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좀… 가, 가, 가….’

 

 

 

매정하게 말하면서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더없이 따듯했다. 유원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장장의 얼굴에 핏방울이 피어났다.

 

 

 

‘후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자, 그땐 인간으로 태어나서 넘치게 사랑 받아…… 장장.’

 

‘그때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해.’

 

‘그럴 리는 없어. 바로 알아볼 거야.’

 

 

 

입을 달싹인 소년이 기어이 벼랑에 몸을 던졌다. 그의 비단 옷깃을 부둥키던 장장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몰아치는 폭포 물살이 외마디 비명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년은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구는 이에 대해 인간 아닌 가짜를 사랑한 죗값이라 이를 터. 인간 아닌 삿된 것을 사랑해서 벌을 받은 그였다.

 

 

 

홀로 남은 장장의 머리 위로 하늘이 부서지듯 벼락쳤다. 마른 나뭇잎이 스산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 눈보라가 몰아쳤고 급기야 모든 횃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밀렵꾼들은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소란을 퍼뜨렸다. 저마다 눈이 먼 봉사처럼 펄쩍대며 캄캄한 숲속을 달아났다.

 

 

 

이 지긋지긋한 사랑 때문에 그 옛날 인적 드문 산을 떠나지 못한 요괴가 있다.

 

 

 

무언가를 오래 사랑해서 미쳐버린 장장은, 오백 년이 지나 한 남자를 만난다. 스스로 산산이 부서뜨리며 사랑을 주던 미련한 남자를.

 

 

 

알아본다 확신했던 그 약속을

 

추악하고 아름답던 이 사랑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잊어버린 건 아닐지…….

 

 

 

장장은 두려웠다.

 

 

 

 

 

 

 

 

 

-

 

 

 

 

 

 

 

 

 

해는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간다. 그 당연한 사실이 때때로 소름 끼치게 좋았다. 어디서 나고 어디로 가는지. 이따금 한빈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 하굣길엔 멍하니 해의 흔적을 구경했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태양을 집었다. 빛의 부스러기가 콧대 위에 고였다. 멍이 번진 볼 안으로 막대 사탕을 굴렸다. 멀리서 골대 그물이 출렁거렸다. 신발장을 나선 여자애들이 스탠드에 드러누운 한빈을 보고 수군댔다. 도련님처럼 생겨선 상놈처럼 맞고 다니는 한빈은 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무념했다. 대신 생각했다.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사채업자 형들을.

 

 

 

형들이 누구시냐. 인생의 쓴맛과 쇠맛까지 알려주는 백종원 같은 분들이다. 풍채마저 백종원을 빼닮은 형들은 한빈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누런 벽에 기댄 꼴이 흡사 송장이었다. 하지만 간헐적인 신음만 흘릴 뿐, 맷집이 좋은 건지 수치를 모르는지 죽은 듯 맞기만 했다.

 

 

 

뺨에 칼자국을 아로새긴 백종원 클론 하나가 코 밑에 검지를 갖다댔다. 형님 이 새끼 숨 안 쉬지 말입니다. 그러자 뒤에서 손짓했다. 나와봐. 용비늘로 뒤덮인 손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뒤진 척이야. 엉?’

 

 

 

억지로 턱이 들린 한빈이 눈을 치떴다. 터진 입술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킥. 웃음도 기침도 아닌 게 흘러나왔다.

 

 

 

‘이 새끼 쇼하네. 씨팔 지금 나랑 드라마 찍니?’

 

 

 

배를 짓누르는 구둣발을 응시하던 시선이 올라갔다.

 

 

 

‘얼굴이 이러니까 뭘 해도 막, 드라마 같고 그렇죠….’

 

‘뭐?’

 

 

 

조곤조곤 개기는 얼굴에 두려움도 비굴함도 없었다. 외려 시건방이 흘렀다. 백종원 클론들은 서롤 응시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대가 어느 땐데 찾아와서 사람을 패세요… 요즘 아동학대 빡센 거 모르나. 업데이트 좀, 하시지.’

 

 

 

얼굴은 순정 만환데 말본새가 느와르였다. 부서진 몸을 일으켜 세운 한빈이 잇새로 혀를 찼다. 그리고 덧붙였다.

 

 

 

‘죄송한데 제가 아동이라, 이러시면 신고할 수 밖에 없어요.’

 

‘신고? 이 씨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조기교육 빡시게 받았네. 안 그래도 애새끼 패널티로 식구들 안 데리고 소수정예로 왔구만. 아그야. 형님 교육 들어간다 말 잘 들어라. 경찰이랑 제일 친한 게 누군줄 알어? 깡패야, 깡패. 응?’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쾅쾅 부서져라 문을 두드렸다. 일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두드림은 점점 거세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이윽고 경쾌한 초인종이 울렸다. 이런 씨팔 새끼가…. 두 시선이 한빈을 향하자, 한빈이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아동 학대. 특수 폭행. 형사 합의금.

 

 

 

‘빚 갚으라면서요.’

 

 

 

열여섯의 성한빈은 깽값으로 빚을 갚는다. 맞는 건 돈을 버는 일이니 괴롭기보단 즐거웠다. 수갑을 차고 나가는 놈들을 향해 손 흔들며 배웅했다. 경찰들은 한빈을 보고 신인류를 마주한 듯 기함했다. 얻어터진 얼굴이 겁대가리를 가져본 적 없는 듯 말갰다. 고작 중딩이 경찰차를 대동해 깡패를 쓸어버리자 동네가 술렁였다. 밑바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난놈이 태어났다고.

 

 

 

난놈은 깨진 식기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으며 담담히 생각했다. 불시에 또 찾아와 깨부시겠지. 그릇들은 미리 베란다에 처박아놔야겠다. 사실 메마른 편이 아닌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밑바닥에서 태어나면 밟히는 게 익숙하니까.

 

 

 

피 묻은 하복을 벗어 통돌이에 넣고, 베란다 난간에 기대 필터를 머금었다. 떨리는 손가락 틈으로 담뱃불이 타올랐다. 눈앞에 초고층 주상복합의 불이 하나둘 켜졌다. 이곳에서 몇 정거장 지나면 부촌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은 왜 전부 높고 먼 곳에 있을까. 해와 고층빌딩이 그랬고 엄마가 그랬다. 밑바닥에선 올려다볼 게 산더미였다. 그러니 올려다보는 눈은 한빈의 상징이었다.

 

 

 

 

 

그 눈을 보며 남자는 말했다.

 

 

 

“너 한 번 해볼래?”

 

 

 

등나무 아래로 큰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한빈의 체육 선생이었다. 한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베개 삼았던 가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멍든 목덜미를 멋쩍게 쓸며 말했다.

 

 

 

“저는 자세가 좋은 것도 아니고….”

 

 

 

빨간 호루라기를 맨 선생이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가 권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양궁이었다.

 

 

 

“자세는 배우면 되는 거란다.”

 

 

 

슉. 슈웅. 그가 유치한 소릴 내며 허공을 향해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넌 바람에 저항하고, 멀리 볼 줄만 알면 되는 거야.”

 

 

 

한빈은 눈이 좋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볼 수 있었다.

 

 

 

“멀리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응?”

 

“지금 바로 옆에.”

 

 

 

린넨 원피스 입은 여자가 당신을 끌어안고 있는데.

 

 

 

“옆에 뭐가? 뭐 묻었니?”

 

 

 

불현듯 선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빈을 반듯하고 활기찬 예스맨으로 알았을 터. 교무실 너머로 볼 때완 달랐다. 애가 묘하게 차분했다. 게다가 한빈은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곤란하단 얼굴로 고갤 갸웃댔다. 이내 선생과 허공을 번갈아 보았다. 선생의 시선이 따라갔다. 옆은 말 그대로 허공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대화 상대가 자신이 아닌 듯했다.

 

 

 

 

 

 

 

-

 

 

 

 

 

 

 

손가락이 핸들을 살포시 두드렸다. 약지에 웨딩링이 번뜩였다.

 

 

 

“어머니랑 잘 이야기 해 봐. 시청 지원은 쌤이 되게 해볼게.”

 

 

 

차량용 액자가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비스듬히 틀어진 액자를 멍하니 응시하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으로 빗줄기가 죽죽 쏟아졌다. 경사가 심한 둔덕에 삐죽빼죽한 빌라들이 드러났다.

 

 

 

오늘은 너네끼리 마셔. 재영이 보러 가야지. 소개는 무슨. 야 이 새끼야, 잡소리 할 거면 끊는다.

 

 

 

차가 천천히 붉은 빌라 앞에서 멎었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액자가 멈췄다. 리넨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비쳤다. 선생은 새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는…

 

 

 

“여기지? 들어가, 한빈아.”

 

 

 

외로운 사람이었다.

 

 

 

“없어요 저도.”

 

“응?”

 

“얘기 할 엄마가 안 계세요.”

 

 

 

굳이 그 말을 왜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덤덤하게 말을 뱉은 한빈이 창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내내 하늘을 보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는지, 선생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핸들을 고쳐잡았다.

 

 

 

“얼굴은 왜 그러니?”

 

“…넘어졌어요.”

 

 

 

한빈은 뒷통수만 보이며 대답했다. 눈도 좋은 애가 넘어졌댄다. 짧게 한숨을 쉰 선생은 낡은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현관 앞에 절름발이 남자가 비에 젖은 이불을 걷고 있었다.

 

 

 

“저희 아빠예요.”

 

 

 

뒤통수가 가지런한 아빠. 트럭에 다리가 구겨진 아빠. 매질 한 번 안 해본 아들을 남의 손에 넝마로 만든 아빠. 사랑하는 아빠.

 

 

 

맞은 편에서 번뜩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방금 내 표정 별로였지? 사과할게.”

 

“이런 얘기 하면 다 그러셔요 뭐….”

 

“전혀 몰랐다, 쌤이 실언했어.”

 

“아니에요. 일상이라.”

 

“…….”

 

 

 

선생은 선뜻 말을 잇지 못 했다. 둘 사이로 나지막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원래 상처가 많을수록 더 반짝거리는 거야.”

 

“….”

 

“네 눈이 그래.”

 

“제 눈요?”

 

“쌤이 눈 하나는 좋은데, 너는 다르다. 한빈아.”

 

 

 

그런가요.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반짝이는 눈으로 꿈을 바라보면.”

 

“….”

 

“가는 길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어.”

 

 

 

눈이 빛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한빈의 눈길이 선생을 향했다. 정말 그럴까? 사랑하는 연인이 따라다니는 것도 못 보는 남자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될까.

 

 

 

한빈은 머리 위에 손우산을 하고 꾸벅 인사했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대뜸 차안에 머릴 밀어넣었다.

 

 

 

“아직 회사에 있대요.”

 

“응?”

 

“재영님 괴롭힌 사람. 책상 서랍에 업무용 폰 있으니까, 카톡 한 번 켜보시고.”

 

“….”

 

“쭌아 너무 오래 아프지 마. 사랑해.”

 

 

 

라는데요. 꿈 주신 보답이에요. 그러면서 민망한 듯 머릴 긁적였다. 양궁 협회 팜플렛을 손가락에 끼운 채였다. 불현듯 선생이 싸한 차안을 돌아봤다. 이어 몸을 기울이고 차창 너머로 소리쳤다.

 

 

 

“내일부턴 넘어지지 마라!”

 

 

 

목발을 짚은 남자, 한빈의 아버지가 비에 젖은 이불을 안고 한 발로 뛰었다. 사춘기 아들이 누구와 함께 집 앞까지 올지는 몰랐던 탓이다. 한빈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

 

“같이 가.”

 

 

 

자연스레 이불을 받아 든 한빈이 그를 부축했다. 종알종알 말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나 양궁 해볼까? 그거 뭐, 돈 많이 드는 거 아니냐? 아냐 아빠. 거기서 지원두 다 해 준대. 부모 앞에선 영락없는 아이였다. 쇳소리 나는 문을 열자 헤진 우유 봉지가 펄럭였다.

 

 

 

신발을 벗은 한빈이 앉은뱅이 상 위에 팜플렛을 올려 놓았다. 열넷의 나이였다. 꿈이란 건 놔두면 무겁고 커진다는 걸 몰랐던 때였다.

 

 

 

 

 

 

 

-

 

 

 

 

 

 

 

양궁 도구를 들고 빌라 앞을 나섰다 돌연 길을 틀었다. 야트막한 뒷산이었다. 열아홉의 12월 말,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는 탓에 짐을 줄여야 했다.

 

 

 

뒷산을 내려오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나 고목을 붙았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빨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눈물을 닦았다. 집은 한결 넓어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꿈은 인생에 자리를 차지하는 거구나.

 

 

 

하지만 꿈은 자꾸만 쌓여가는 짐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대학생도 아닌데 대학교 앞을 지나다 명함을 받았다. 신생 소속사였고 연기 학원에 등록해 주었다. 투자 차원이랬다. 이후 번번이 오디션을 낙방한 끝에 첫 필모를 만들었고, 독립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탔다. 이제 작품이 없어도 연기 학원 알바로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상을 탄 날엔 원대한 꿈도 일기에 적어내렸다. 죽기 전에 남우주연상 타보기. 팬카페 회원 500명 넘기.

 

 

 

대본을 쥐고 칫솔을 물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한빈씨 우리 학원 파트 말고 개인 과외 할 생각 있어? 누가 한빈씨 작품을 인상 깊게 봤대.]

 

 

 

네 저야 시켜주시면 감사하죠! 팔 안에 대본을 끼운 채 타자치던 순간이었다. 금이 간 거울 위로 난데없이 빨간 형체가 비쳤다. 미간을 구긴 한빈이 불시에 뒤돌았다.

 

 

 

이지가 흐리고 불분명한, 구천을 오래 떠돈 귀신이었다. 어린 아이인지 키가 유달리 작았다. 피칠갑을 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는 귀신은 한빈을 끈질기게 쫓아왔다. 맥도날드 창가에 앉아 햄버거를 먹을 때도 가로등 아래를 걸을 때도. 자꾸만 따라왔다. 양궁 선생님도 그렇고, 귀신이 붙는 건 이유가 있었는데.

 

 

 

 

 

너는 누구야? 이름이라도 말 해봐.

 

 

 

 

 

공원 공중 화장실. 환풍기 팬이 부산스레 돌아갔다. 한빈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꿇어앉았다.

 

 

 

해코지 하는 건 아니지? 그럼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힘을 실은 투에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어둑한 전등만 깜박였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빈이 화장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아이가 앞을 막아섰다. 돌아선 아이는 먼지가 하얗게 쌓인 화장실 유리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영산.

 

 

 

아이의 이름은 영산이었다.

 

 

 

그래 영산아.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난 해결해줄 능력이 없어. 따라오지마. 하지만 영산은 계속 쫓아왔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팔을 내저었다.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는 모양새였다. 멀리서 스탭이 한빈에게 고함쳤다.

 

 

 

혼자 뭐 해?

 

 

 

머쓱해진 한빈이 대본을 품에 안고 달려갔다. 영산이 온 그날. 못내 이상한 꿈까지 꾸었다.

 

 

 

모르는 남자가 눈 내린 숲에서 너절하게 울고 있었고, 그에 안긴 한빈은 두개골이 빠개질 듯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쏟았다. 커다란 폭포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이내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인상을 쓴 한빈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고통은 생생했고 장면은 차갑고 신령스러웠다. 연예인인가? 보았던 드라마인가? 대본집에 남자의 얼굴을 그리다 관두었다.

 

 

 

남자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성한빈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그날 아침 한빈은 거울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눈두덩이가 무덤처럼 부어있었다. 물을 폭포처럼 틀어놓고 한참 멍했다.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고 모든 게 꿈인 듯 하다가도 선명했다.

 

 

 

아… 왜 이러냐.

 

 

 

본 적도 없는데 그리워져 막막했다. 목구멍부터 답답함이 치밀었다. 주먹이 가닿는 대로 심장을 때렸다.

 

 

 

그날 저녁. 열린 안방문 틈새로 티비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늬들이랑 무슨 재밀 본다고 이러고 있냐. 아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앙칼진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늘어진 티를 입고 설거지하던 한빈은 대사를 노래처럼 중얼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달그락대는 그릇에서 거품이 튄 방향으로 고개를 떨구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작은 손이 한빈의 팔목을 현관으로 잡아끌었다. 영산의 손에 이끌려간 곳은 진관사 아래 사찰음식집이었다. 한빈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도 오래된 노포처럼 생긴 가게의 이름은 귀옥이었다. 지도에는 없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끼긱 신경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은 들여다 본 한빈이 퍼뜩 어깨를 털었다. 박제된 여우가 벽에 납작하게 매달려 있었다. 동물을 이렇게 함부로 박제해도 되는 건가. 의문하던 그때였다.

 

 

 

“게 서서 뭐 해.”

 

 

 

푸성귀를 다듬던 백발의 노파는 태연히 말했다. 알던 사이처럼, 수저통에서 손수 수저를 꺼내주며 턱짓했다.

 

 

 

“뭘 멀뚱히 있어. 이리 와 앉어.”

 

 

 

그녀가 내놓은 수저는 두 짝이었다.

 

 

 

“…저 혼자인데.”

 

“둘인데.”

 

“네?”

 

 

 

동시에 영산이 익숙하다는 듯 옆에 앉았다. 얼결에 착석한 한빈이 제 눈을 의심했다. 메뉴 이름이 하나같이 이상했다. 해주 복수 재회. 이름을 곱씹던 한빈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좌식 테이블에서 얼굴에 시뻘건 화상을 입은 남자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대낮에 빛이 들어오는 가게 안에 손님들이 전부 그림자가 없었다. 그러니까, 모두 귀신이었다.

 

 

 

제 아무리 귀신을 보는 성한빈이라도 귀신을 대접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의식한 순간부터 공기가 못내 기이하고 매스꺼웠다. 괘종시계 시침이 심장을 두드렸다. 참다 못한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은 밖에 있나요? 손 씻고 싶어서….

 

 

 

반찬까지 금세 내놓은 탓에 나가기 애매했다. 궁색하게 말을 덧붙이자, 구부정한 허리를 편 노파의 칼끝이 주방 너머 문을 가리켰다. 이내 그녀는 한빈의 등 뒤로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고됐을 거야. 오기까지.

 

네?

 

 

 

커텐을 걷던 한빈이 돌아보았다. 적막 사이로 노파는 심드렁히 마늘을 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

 

 

 

 

 

 

 

확실한 건 이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사방에 향을 피우는지 연기가 가득했다. 한빈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팔을 내저었다. 누가 목덜미를 쓸듯 바람이 지나갔다.

 

 

 

무언가에 어깨를 부딪친 건 그때였다. 오래된 골동품인지 낡은 구리로 된 소재였다. 한빈이 찬찬히 뒤로 걸으며 그 앞에 섰다. 이어 덜컥 입을 막았다.

 

 

 

그것은 거울이었다. 구리 거울 너머로 자신과 똑닮은 남자가 비쳤다. 흙밭에 굴렀는지 넝마가 된 비단옷. 피 흘리며 우는 얼굴. 그 아래 깎아지른 절벽. 한빈은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었다.

 

 

 

거울은 업경대(業鏡臺)라는 이름으로, 전생의 죄와 업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성한빈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커텐을 걷고 뛰쳐나와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뒤에서 스텐 바구니를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다 봤구나.”

 

 

 

한빈이 천천히 돌아섰다. 거기서 뭘 보아야 했던 건지. 내게 왜 이러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일었다. 표정조차 흐릿할 만큼 주름진 얼굴에서 이유 모를 기백이 느껴졌다.

 

 

 

“…열어주세요. 문.”

 

“하늘도 무심하지. 너 같은 자에겐 망각이 독인 것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화라도 내려던 차였다. 불현듯 한날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잊은 듯해 한참을 괴로워했던 때. 꿈을 꾼 날이었다.

 

 

 

 

 

 

 

-

 

 

 

 

 

 

 

 

간간이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거짓이라 여겼다. 남들이 믿지 않는 귀신을 보면서 그랬다. 그래, 전생과 귀신이라는 게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대체 이 귀신은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걸까. 한빈이 영산을 내려다보았다.

 

 

 

“널 모시던 너희 집 관비. 벙어리인 탓에 양반집을 전전하다 니가 거뒀지. 영산이란 이름도 네가 지어줬고.”

 

“이렇게 작은 아이가… 노비라구요?”

 

“못 먹어 그러지 열은 넘었어.”

 

“…….”

 

“피칠갑을 한 이유는… 네가 죽을 때, 얘도 죽었거든.”

 

 

 

한빈이 무어라 입을 벙긋하던 그때. 노인이 말허리를 잘랐다.

 

 

 

“성유원. 평생 선을 베풀었는데 돌아온 건 화뿐이었지. 그건 다 네가 네 집에 영물을 들였기 때문이라.”

 

“지금 무슨 말을….”

 

 

 

일시에 그녀가 도마 위에 올린 닭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빈이 고갤 피했다. 닭피가 도마 위를 붉게 적셨다. 매섭게 치뜬 눈이 한빈을 향했다.

 

 

 

“네가 영물을 들인 후로, 네 어미는 광증에 걸려 부락을 떠돌다 얼어죽고, 가축은 굶어 죽고, 종들은 화적떼 습격으로 불에 타죽었어. 하지만 그 영물만은 아직까지 살아있지. 뻔뻔하게.”

 

 

 

 

 

가문에 깃든 저주였노라고, 그녀가 운을 뗐다.

 

 

 

전생의 네 할아비 되는 자. 그자는 명과 조선의 국경에서 여우와 범의 씨를 말려 비싼 값에 가죽을 팔아넘기는 이였어. 양반이었지만 장사치나 다름없이 탐욕을 부린 탓에 고을 내에 악명이 높았지.

 

 

 

너희 집은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고 해서 호성가라 불렸어.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모든 생명엔 혼이 있고 귀기(鬼氣)가 있는 법인데, 이를 무시하고 밤낮으로 살생을 일삼았으니……. 저주가 들 수 밖에. 설상가상 조부가 죽은 후 무지한 네가 여우누이를 들였고, 결국 저주는 일가뿐만 아니라 고을 전체로 퍼져 마을 일대가 떼죽음을 면치 못했지.

 

 

 

이윽고 그녀는 장장을 소개했다.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라고.

 

 

 

“그놈이 누군지, 이미 넌 알고 있어.”

 

“….”

 

“만났고 말고. 현실보다 현실 같았던 몽중에.”

 

 

 

그 순간 한빈이 어깨를 흠칫 털었다. 불현듯 허벅지가 진동했다. 휴대폰 알람이었다.

 

 

 

[한빈쌤. 지난 번 말했던 과외 학생 프로필 이제 보내드려요.]

 

 

 

문자엔 프로필과 함께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훑은 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 남자였다. 꿈에 나타난 남자. 꿈으로 느꼈던 기시감은, 헛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한빈은 알 듯했다. 자신이 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꿈이자 전생. 망각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장난이었다.

 

 

 

“아직도 유인 당하는구나.”

 

 

 

노파는 듬성듬성한 아랫니를 드러내며 혀를 찼다. 나무 도마 위에서 칼이 서걱서걱 움직였다.

 

 

 

“결정을 해야할 게야. 이생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

 

 

 

멀뚱히 있다 죽음을 맞이할지, 뭐라도 해 볼지. 수챗구멍 같은 귓속으로 그녀의 말이 흘러들어왔다.

 

 

 

그 자식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괴물이야. 사람이 되기 위해 500년을 살아냈지. 그 간악한 것은 널 사랑한 적 없어, 언제나 살기 위해 이용할 뿐……. 이 말을 꼭 기억하렴. 사랑한 적 없다고. 절대… 속아선 안 된다고.

 

 

 

이제 가슴 아팠던 이유를 알았다. 연정이 아니라 저주였고 그리움이 아니라 한이었다. 사랑이 이렇게 뼈 아플 리 없다.

 

 

 

“제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 건가요. 한빈이 묻던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남자 둘이었다. 그들의 손엔 총을 맞았는지 너절하게 늘어진 여우 사체가 있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잘 봐 둬라.”

 

“네?”

 

 

 

여우 사체가 철장에 처박혔다. 남자 중 하나가 여우의 털이 묻은 손으로 한빈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간 드라마가 얼마나 미화를 해둔 건지. 외모가 엉망진창인 도깨비였다.

 

 

 

“할 수 있겠지?”

 

“…….”

 

 

 

군살이 잡힐 정도로 투박한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유분방하고 누런 덧니를 드러내며 묻는 말에 한빈은 어색하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죽일 수 있겠냔 말이었다. 못할 게 무엇인가. 인생에 판타지 좀 들어갔다고 사릴 자신이 아니었다.

 

 

 

 

 

 

 

-

 

 

 

 

 

 

 

내 인생에도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을까?

 

 

 

 

 

한빈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는 동화 작가였다. 동화책을 읽으면 동화에서 살고 싶었다. 성인이 된 한빈의 삶은 저주가 깃든 동화가 되었다. 그것도 밑바닥 동화.

 

 

 

현관에 들어서자 목덜미가 서늘했다. 주방과 거실에 이어진 책장에서 책이 툭 떨어진 건 그때였다. 여우전이란 제목의 고전 동화였다. 우리집에 이런 책이 있었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우전을 펼치자 한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부근에 페이지가 딱 다섯 장 뜯겨 나가 있었다.

 

 

 

불현듯 고개를 돌리자 안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너울거렸다. 퍼뜩 쫓아나갔다. 멀리서 키가 큰 남자가 유유히 길을 나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점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소실 된 5장

 

미련한 클로버

 

 

 

 

 

창밖이 시끄러웠다. 바깥에서 창문을 두드려댔고 유리창 부딪치는 소리가 대포 쏘듯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은 한빈은 대강 시간을 가늠했다. 한 시간 정도 됐나. 이쯤되면 노력이 가상했다.

 

 

 

한빈은 이불 속에 몸을 옹송그린 채 눈을 굴렸다. 미닫이 문을 걸어 잠그자 아침부터 장호가 창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밥 안 먹어? 너 좋아하는 밥.”

 

“어.”

 

“나는. 나 안 보고 싶어?”

 

 

 

창문에 실눈을 들이댄 장호가 한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보지 마.”

 

“어떻게 보는데 내가. 나 되게 이쁘게 보는 중인데 너.”

 

“미친놈.”

 

 

 

장호는 진심이었다. 하얀 옆태가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백 년이 아니라, 천 년도 기다릴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가짜라도 아름다웠다. 장호가 창에 입김을 불었다. 한빈의 유려한 콧대 굴곡을 따라 손가락으로 창문을 쓸었다.

 

 

 

“왜 맨날 가래.”

 

“보기 싫으니까.”

 

“와~ 완전 상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냥 죽여 날….”

 

 

 

어제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겨운 초야였다. 첫경험을 남자 아니 남자도 아닌 것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피곤에 절은 얼굴이 끔찍한 듯 입술을 씹었다. 반면 창틀에 턱을 괜 장호는 나긋하게 웃었다.

 

 

 

“살이 찢어지는 것보다 뒤가 뚫리는 게 무섭구나 성한빈은.”

 

“…….”

 

“좋다.”

 

 

 

순간 이불을 걷어찬 한빈이 쉰 목소리로 뇌까렸다.

 

 

 

“…또라이야? 꺼져.”

 

 

 

장호가 고개를 갸웃댔다.

 

 

 

“또라이? 좋은 거야?”

 

“하… 그래. 좋은 거니까 많이 해 다 해.”

 

“웅. 이렇게 잘생긴 또라이랑 친하게 지내.”

 

 

 

진득하게 애교가 묻은 투였다.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자뻑이었다. 한빈이 이불 속에서 소리쳤다.

 

 

 

“가라고 좀!”

 

“웅~ 잘자 우리 아기. 잘 자고 건강해서 나랑 또 떡쳐야지.”

 

 

 

또라이를 모르는데 떡치는 건 알고 있는 이상한 요괴였다. 건성으로 손을 흔든 장호가 뒤돌았다. 그리고 한량처럼 잔디를 가로질렀다. 은은하게 기분 좋은 티를 내는 게 배알이 꼴렸다. 아기 취급은 뭐지. 스물이 넘은 건장한 남자에게 아기라고 할만 한 이는 부모밖에 없다. 내 부모라도 되나. 부모를 자처하는 그의 머릿속엔 지난 밤 엉망이 된 성한빈이 있을 텐데.

 

 

 

마지막엔 붙잡고 빼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혼 빼놓고 느낀 순간이 떠오르자 수치심이 일었다. 창 너머로 새가 깍깍 울었다. 그마저 장장의 희한한 웃음소리 같았다. 한빈은 소리 없는 악을 쓰며 귀를 막았다.

 

 

 

 

 

“나도 한다고. 연기인가 뭔가.”

 

“…….”

 

 

 

오늘 무슨 날인가 의문했다. 왜 돌아가면서 사람 속을 뒤집을까.

 

 

 

미닫이문에 불량스레 기댄 장소정을 어이 없다는 듯 훑었다. 남매가 이렇게 성격이 달라도 되는 건가. 장호가 감추는 일의 귀재라면 장소정은 감정을 전혀 숨길 줄 몰랐다. 그녀가 숨길 줄 아는 건 등 뒤에 있는 것뿐이었다.

 

 

 

“나 시급 비싸. 얼마 줄 건데.”

 

“얼마 필요한데?”

 

“먼저 제시해.”

 

“이걸로 퉁쳐.”

 

 

 

그녀의 등 뒤에서 나온 건 세잎 클로버였다. 한빈이 제 손바닥에 올려진 세잎 클로버를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개그하냐. 네잎도 아니고 세잎 클로버는…….”

 

“우리 집엔 토끼풀 많이 안 나. 귀한 거야.”

 

 

 

자랑하듯 말하는 그녀를 나지막이 응시하던 한빈이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내 마른세수를 했다. 애가 자존심도 세면서 하는 짓은 은은하게 푼수였다. 이거 뭐 어쩌라고…. 돌아가면서 골을 때리네.

 

 

 

“너 뭐… 금쪽이야?”

 

“뭔데 그건. 좋은 거야?”

 

 

 

요즘 유행어는 따라잡기가 왜 이렇게 힘드니. 한빈이 황당한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귓등을 긁었다. …금 들어갔으니까 좋은 건가 보지?

 

 

 

불현듯 기시감이 일었다. 남매는 남매라고, 한빈은 생각했다.

 

 

 

“나도 할래.”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접근금지 처사를 받아놓고, 문이 열리자 냄새 맡은 동물처럼 뻔뻔하게 쫓아온 장호가 빙글거렸다. 내가 좀 귀한 편이라.

 

 

 

한빈이 한숨을 내쉬자 둘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귀가 밝은 동물처럼. 고개를 퍼뜩 움직이는 꼴이 영락없는 남매였다. 걸음이 빠른 것도, 맥락 없이 고성방가를 하며 오페라를 부르는 것도, 고상하게 커피나 와인을 마시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닮아 있었다. 한 핏줄이 분명했다. 성한빈 골을 때리는 게 유전인 핏줄이었다.

 

 

 

“무슨 얘기 해.”

 

 

 

장호가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장소정이 삐딱하게 받아쳤다.

 

 

 

“니 얘기 안 해.”

 

 

 

둘은 서로를 마뜩잖게 응시했다. 한빈은 묵묵히 한 핏줄의 생쇼를 관람했다.

 

 

 

“우리 되게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빨리 나가줄래?”

 

“웃기네. 니가 무슨,”

 

“맞아.”

 

 

 

한빈이 말을 보탠 건 그때였다. 둘의 눈이 마치 작품 밖 작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 휘둥그레졌다.

 

 

 

“나가줘.”

 

 

 

드물게 당황한 장호가 뒤로 걸었다. 그러다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약 올리는 표정을 지은 소정이 그를 밀어냈다. 미닫이문이 세게 닫혔다. 후련한 듯 손을 턴 그녀는 방을 훑는 체했다. 이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 순간 한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를 따라 장소정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아는 거? 니가 나 보자마자 연못에 처박은 거. 그거 하나 아는데.”

 

“….”

 

“그러니까 괜한 걸로 힘 빼지마. 난 너 몰라.”

 

 

 

한낮의 연못에 빠진 장소정을 구해주던 얼굴도, 꽃잎 같은 풀이라며 토끼풀을 좋아하던 얼굴도, 전부 그대로였다. 정말 똑같았다. 성유원인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럴 때면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장호가 애먼 놈을 불러들여 헛짓거리 하는 게 아닌가 혼돈이 올 정도로.

 

 

 

“기억 안 나? 니가 나 엄청 좋아했어. 좋아 죽었지 아주, 피곤하게.”

 

 

 

그래서 장소정은 오빠의 기억을 훔쳐 연인 행세를 했다. 어차피 기억 못하니 추억이야 훔치면 그만이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연못은 우리 추억이 있는 곳인데. 물맛 그리울 때 안 됐니? 또 빠지고 싶으면 말 해. 내가 원래 사람이 힘이 넘치고 그러거든.”

 

“그래? 힘이 넘치는구나….”

 

 

 

한빈의 눈길이 장소정을 훑었다. 장호와 다른 듯 닮았다. 그래봤자 유사품이지만. 침대에서 벗어난 한빈이 반팔 위로 체크 셔츠를 걸쳤다.

 

 

 

“넌 흙맛이 그립나 보네.”

 

“뭐?”

 

“미안. 하는 짓이 너무 험해서, 사람 아닌줄.”

 

 

 

손뼉을 친 그녀의 얼굴에 기이한 화색이 돌았다.

 

 

 

“너 연기 진짜 잘하는구나?”

 

 

 

한빈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여기 오지 않았겠어?”

 

 

 

고개를 기울인 장소정은 똑소리 나게 혀를 굴렸다.

 

 

 

“여기 온 이유가 뭐야?”

 

“장호가 불러서.”

 

 

 

그 순간 장소정은 깨달았다. 그를 바보 취급 했지만 뭘 모르는 건 자신이었다. 그의 말은 거짓이다. 불러서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온 것이었다. 한빈이 짧은 탄성을 뱉으며 뒤돌았다.

 

 

 

“그리고 난 행운 좋아해.”

 

 

 

장소정이 기가 찬 듯 헛웃음쳤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세잎 클로버를 노려보았다. 저 하얀 얼굴로 속이 시꺼먼 걸 생각하니, 어쩐지 깜빡 속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침대 너머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장호가 아닌, 장호를 닮은 얼굴. 이 얼굴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 항상 두 번째였다.

 

 

 

‘유원은 내가 몇 번째로 좋아?’

 

‘음….’

 

‘나보다 장장이 더 좋아? 나는 두 번째야?’

 

 

 

대답 같은 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거칠게 문을 연 그녀가 자리에 멎었다. 눈앞에 귀신처럼 장호가 서 있었다.

 

 

 

“내 행세를 하네.”

 

“깜짝아.”

 

“난 깜짝이가 아닌데. 깜찍이면 인정.”

 

“제발 닥쳐. 어디까지 들었어?”

 

“뭘 들어?”

 

“썅… 뭐 믿을 놈이 있어야지.”

 

 

 

장소정이 나오라며 손사래쳤다.

 

 

 

인간 행세를 하는 장장. 장장 행세를 하는 장소정. 불량품이 판을 치는 이곳에서 유일한 진품은 성한빈이었다.

 

 

 

 

 

진짜와 가짜

 

 

산 아래는 말이 시내지 촌구석이었다. 20년 전 사거리에 터를 잡은 분식집엔 드문드문 손님이 앉아 있었다. 장호와 한빈. 둘은 구석으로 향했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간간이 무리 지어 들어왔다.

 

 

 

쇠젓가락을 든 장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접시에 담긴 익힌 돼지 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며칠 전 코피를 쏟았을 때, 한빈은 아연실색했다. 피 흘리는 사람 앞에서 아래를 세우는 놈은 처음 봤다. 개버릇 남 못 준다고 껍데기만 인간이었다. 그래서 데리고 나왔다. 많이 먹으라고. 저녁 시간이 지난 탓인지 학생보단 커플이 많았다. 허파 많이 먹으면 바람 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테이블 너머로 농담을 던졌다. 커플이 꺄르르 웃어 넘어갔다.

 

 

 

“나 바람 나도 돼?”

 

 

 

그 광경을 보던 장장은 너스레를 떤다. 익숙하게, 사람처럼.

 

 

 

“바람은 허파를 먹어야 나는 거고.”

 

“…….”

 

“넌 간 먹어야지. 좋아하는 거 많이 먹어.”

 

 

 

벌겋게 흠뻑 젖은 간. 인심 후한 주인 아주머니가 가득 뿌려준 떡볶이 소스. 장장은 묘한 얼굴로 한빈을 응시했다. 이윽고 주위를 훑다가 한빈에게 속삭였다.

 

 

 

“먹여줘.”

 

“뭐?

 

 

 

다정히 서롤 먹여주는 커플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가 포크로 간을 찍어 한빈을 향해 내밀었다. 한빈이 멀뚱히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나도 애기야!”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500살짜리 애기를 쳐다보았다. 유리에 바람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만큼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커플이 먹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학생들은 마시던 물을 도로 뱉었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던 사장은 소름 끼친 듯 어깨를 털었다.

 

 

 

“싫어?”

 

“싫어.”

 

“왜.”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없으면 먹여 줄 거야?”

 

 

 

에어컨 온도가 내려갔나. 섬찟해진 한빈이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이 덜컹 흔들렸다. 너 언제 사람 될래? 옆에서 사랑 싸움이 발발했다. 그들은 사람됨을 논했다. 장장이 돌발 행동을 한 건 그때였다.

 

 

 

“얘도 안 되고 싶겠어요?”

 

“야!”

 

 

 

한빈이 대신 사과하며 입술 위로 검지를 붙였다. 쉿, 옆 사람한테 말 걸면 안 되는 거야. 유치원 교사처럼 어르는 투였다. 장장은 억울한 듯 입술을 비죽였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도 아니면서……. 흉내 내봤자 가짜 주제에. 진짜와 가짜는 사실 한빈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장호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딴 것에 집착하고 있다.

 

 

 

한빈이 찬찬히 입술 거스러미를 씹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 미친 남자가 갈구하는 무언가를 알게 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픈 이유는 뭐지? 그래서 불쌍하면 어쩔 건데. 간이라도 내줄 건가. 옛날에도 불쌍한 척으로 날 꼬여냈나. 기가 차고 황당했다. 아량이 넓다 못 해 원수까지 이해하려 드는 자신이.

 

 

 

“안 먹여주면 안 먹어.”

 

“안 먹여줄 건데. 안 먹을 거야?”

 

“응.”

 

“그럼 언제 사람 될래.”

 

 

 

장호가 스텐 물컵을 텅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더 해 보란 얼굴이었다. 은근하게 놀리는 말들을 여유로이 넘기는 건 끝났다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그의 표정 위로 균열이 갔다. 어느 틈에 표정을 갈아끼웠는지 그가 턱을 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람이 못 돼서 싫어?”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기이하게도 성한빈은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몸속의 장기 중 가장 뜨거운 곳. 심장이.

 

 

 

아파하는 그는 어딘지 안쓰럽다. 안쓰러운 모든 것은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성한빈은 지금 원수가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다. 그가 약해 보일 때마다 정작 약해지는 건 성한빈이었다.

 

 

 

입술을 달싹대던 한빈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포크 허리를 엄지가 하얘질 만큼 눌렀다. 잠자코 감은 눈 속에서 눈알을 굴렸다. 문득 어떤 충동이 일었다.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죽고 싶었다. 포크에 찔려 죽은 사람이 있나?

 

 

 

잇살을 깨문 순간. 손바닥 위로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불현듯 눈꺼풀이 트였다. 한빈의 손을 든 그가 포크에 걸린 간을 삼켰다. 뒤이어 우물우물 씹으며 읊조렸다.

 

 

 

“이건 맛이 없네…….”

 

“…….”

 

“더 맛있는 거 없나아.”

 

 

 

고상하게 혀를 찬 장호가 메롱했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들이 장호를 지나쳐갔다. 가게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날이 화창해서 햇살이 따사로워서 죽고 싶을 만큼 아주 좋은…….

 

 

 

그런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콱 죽어버리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오늘 오후는 내내 사랑스러웠다.

 

 

 

 

 

 

 

 

 

공든 탑은 무너질까

 

 

 

보고 있자면 늪지에 턱끝까지 잠긴 듯한 영화였다. 영화 박쥐 속 뱀파이어 이야기는 감정선이 기이하고 공감이 어려운 소재였다. 한편 타성에 젖은 장장이 티브이 볼륨을 최대치로 키웠다. 주인공 김옥빈이 동네 지붕들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송강호가 그의 뒤를 쫓았다.

 

 

 

너 맛있자고 몇 명이….

 

자꾸 인간적으루 생각하지 마, 인간도 아니면서.

 

 

 

장장은 영화와 대본집을 비교하며 고요하게 대사를 읊었다. 모노드라마처럼 홀로. 그건 마치 제 안의 두 존재가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뭐야, 우리가?

 

뭐긴 뭐야. 인간 먹는 짐승이지. 여우가 닭 잡아 먹는 게 죄야?

 

 

 

장장을 울린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여우가 닭 잡아 먹는 건 죄가 아니지만, 사람을 먹어야 사람이 된다는 아이러니가 뾰족하게 그를 찌르는 모양이었다. 곧 사람을 죽일 거면서 이렇게 연민이 헐값이어서야. 신이 혀를 찰 만큼 마음 약한 요괴였다.

 

 

 

한빈은 안겨드는 장장의 정수리 위에 턱을 얹었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티브이 화면을 응시했다. 해피버스데이, 태주씨. 이내 대사를 따라 읊는 장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까만 눈에 슬픔이 있었다. 막막하리만치 커다랗게 고인. 건들면 곧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데? 왜 내 무덤에 메밀꽃을 올려두고, 멋대로 그리워하고……

 

 

 

컵을 쥔 한빈이 상념을 삼켰다. 자신을 죽이고도 이런 얼굴로 슬퍼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의 슬픔이 상스러워 보였다. 악어의 눈물이자 짐승의 연민 아닌가. 위선이었다. 하지만 상스러운 존재는 사랑스럽다는 걸, 결핍을 안은 존재야말로 아름답다는 걸. 성한빈은 알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장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장의 눈길이 서서히 떨어졌다. 한빈의 콧대를 지나 입술로.

 

 

 

“할 말 있어?”

 

 

 

시선을 견디다 못한 한빈이 물었다.

 

 

 

“할 말?”

 

 

 

지상파 채널에서 애국가가 고요히 흘렀다. 바깥은 빗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사 절까지 마친 애국가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마치 심장이 멎은 소리처럼 삐 소리가 적막을 채울 때. 장호가 말했다. 그거야 맨날 있지. 뭔데?

 

 

 

“뽀뽀 해달라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한빈의 상체가 모래성처럼 뒤로 무너졌다. 성한빈은 모래성처럼 대충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인데. 장장은 매순간 성한빈이란 공든 탑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뽀뽀 끝나지 않았어?”

 

 

 

장장의 볼에 묻은 입술이 웅웅거렸다. 말간 얼굴로 떠보는 투가 천연했다. 한 손으로 한빈의 배꼽 아래를 지분대던 손짓이 멎었다. 장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의 의도가 모호했다. 다 하지 않았냐는 말인지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말인지. 아마 전자일 터였다. 장장이 기운 빠진 듯 웃었다. 그리고 쏟아지듯 한빈을 끌어안았다.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너 이틀 뒤에 생일이라고 했지.”

 

“응. 왜?”

 

“내가 선물 줄게.”

 

“…뭔데?”

 

“그때는 웃어줘….”

 

 

 

그게 무슨 말이야.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마가 떴다. 한빈이 의문하며 고개를 내렸다.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장장이 부드럽고 순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포근한 숨소리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토록 무방비한 순간을 그를 만난 이래 본 적 없었다.

 

 

 

불현듯 한빈이 그의 두꺼운 목을 그러쥐었다. 이내 서서히 힘을 주면서, 숨이 멈추는 걸 기다렸다. 잠든 그가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잠자코 내려다보던 한빈이 갈빗대에 귀를 붙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한빈이 그랬던 것처럼, 심장이.

 

 

 

당연한 소리지만, 그에게도 심장이 있다. 늘 제멋대로에 갈피 따위 잡히지 않는 그에게도 심장이 있다. 고작 목을 쥔 것뿐인데 심장까지 움켜쥔 듯한 기묘한 감상이 일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기묘한 전능감이 전신을 싸고 돌았다. 사실 장장을 만난 후로 정상이란 터널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터널 밖은 하얀 연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지금 성한빈의 시야는 흐릿했다. 하지만 흐릿한 와중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리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기이한 이끌림에 시달릴 것을. 몇 번의 생을 거쳐 널 만나면, 나는 전혀 면역이 들지 않은 몸으로 다시 무너질 것을. 살아도 죽음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감정을 우리는 타액으로 나눌 것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웠다. 한빈이 장장의 목을 감싸 안고 짧게 입을 맞췄다. 요괴와의 입맞춤은 이골나게 달아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꿈 미래 안정 성공. 이런 희망적인 단어들은 너무 쓴맛이 나서 입에 넣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쓴 게 좋다는 걸 알지만 어린아이처럼 괜스레.

 

 

 

 

 

 

 

 

 

비련의 클로버

 

하늘이 깨진 듯 천둥 소리가 울렸다.

 

 

한빈은 무덤에서 일어나듯 발작하며 깨어났다. 어느새 아침이 왔다. 새벽부터 비가 온 탓에 공기가 쌀쌀했다. 간밤에 장호가 덮어준 모양인지 얇은 모포가 손에 잡혔다. 불현듯 뺨이 간지러웠다. 볼 위에 손을 얹던 그때였다.

 

 

 

두 손가락에 무언가를 잡은 한빈이 눈썹을 내려뜨렸다. 네잎 클로버였다. 착잡한 숨을 내쉬며 눈두덩이 위에 손등을 얹었다. 잇새로 쇳소리가 삐져나왔다.

 

 

 

“누가 이런 거 해 달래…….”

 

“우리 집에 이거 많이 없어. 열심히 찾은 거야.”

 

“…….”

 

“행운을 빈다, 그런 뜻이니까.”

 

 

 

쇼파등에 턱을 괸 장호가 윙크했다. 족보도 없는 똥강아지가 그려진 티를 입고. 한빈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다. 그렇게 웃기 시작하더니 한참을 실성한 듯 웃었다. 장호는 뿌듯한 듯 마주 웃다가, 계속되니 민망한 듯 귓등을 긁었다. 그제야 웃음을 그친 한빈이 눈가를 훔쳤다.

 

 

 

왜 나의 행운을 빌지? 나의 행운은 너의 죽음인데.

 

 

 

친절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의 행운인데. 그걸 부추기는 너라니. 모순이다. 기쁘라고 가져온 선물에 입매가 일그러졌다. 마음 약한 건 장장만이 아니었다.

 

 

 

한빈은 쇼파 구석에 놓인 대본집을 펼쳐 클로버를 끼워넣었다. 이내 책 모서리에 입술을 박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후 내내 꾸벅꾸벅 졸다 보면 어느새 꿈속을 걸었고 결국은 벼랑 앞이었다. 번쩍 놀라며 눈을 떴다. 유리문으로 툭툭 물방울이 튀었다. 하늘이 뭘 아는지 종일 비바람을 퍼붓고 있었다.

 

 

 

한빈이 쇼파 밑으로 미끄러지듯 발을 내렸다. 자꾸 애먼 놈에게 나를 바치고 싶어지는 건 무슨 감정일까. 모를 일이었다.

 

 

 

그즈음 성한빈에게 새로운 특기가 생겼다. 생략과 시치미였다.

 

 

 

 

 

 

 

행운이 온다

 

 

모든 존재가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갈 뿐.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한빈은 그 말을 불경처럼 입에 붙였다. 신념과도 같았던 연민을 버리는 연습을 했다.

 

 

 

왜냐면 비극 속 비련의 주인공은 사절이니까. 비극이 주는 역겨운 오르가즘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거니까. 성한빈은 바꿔야 한다. 불운을 행운으로. 비극을 희극으로. 진창을 천상으로. 이 장르는 성한빈의 손으로 바꿔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낮이 길고 밤이 짧은 6월의 하지였다. 행운이 오는 날은.

 

 

 

달이 뜬 시각. 살금살금 복도를 거닐었다.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는 형광조끼 둘에게 멀리서 옷을 벗는 시늉을 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캄캄한 밤중에 저 조끼는 눈에 띌 공산이 컸다. 하지만 알아먹지 못한 모양인지, 저들끼리 막 소란을 냈다. 이어 하나는 계단을 올랐고 하나는 한빈을 향해 걸어왔다.

 

 

 

더 큰 소리가 나기 전에 발을 내딛던 한빈이 발소리를 죽이며 멈춰섰다. 덧니가 의아한 듯 그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한빈이 먼저 가라는 듯 턱짓했다. 작게 열린 미닫이문에 등을 댄 덧니가 귀를 갖다댔다. 그 순간 불현듯 머리 위로 기척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성한빈. 드디어 제 발로 온 거야? 내가 보고 싶어서.”

 

분명히 침대 위에 있어야 할 장호가 그곳에 있었다. 어둠을 헤집은 장호가 덧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내 모양새를 면밀히 살피더니 혀를 찼다.

 

 

 

“…아니네? 성한빈이?”

 

“윽!”

 

 

 

목이 졸린 덧니가 무작위로 총을 난사했다. 침대 너머 유리창이 깨졌다. 목재가구에 총알이 박혔다. 총알이 장호의 팔뚝을 스친 건 그때였다. 그는 구멍난 팔뚝을 무감하게 내려다보고 덧니의 목울대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짐짓 모가지가 비틀린 덧니가 허공에서 발버둥쳤다. 쥐고 있던 단총이 툭 떨어졌다. 장호는 느릿하게 총을 줍고 방을 나섰다.

 

 

 

“성한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성한빈 어디 갔어. 나 달래줘. 누가 나 때렸어.”

 

 

 

기다란 복도를 거닐었다.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복도 창틈으로 연거푸 바람이 불어왔다. 커텐이 흩날렸다.

 

 

 

“숨은 거야? 숨었으면… 잡히지 마.”

 

 

 

유인하는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슬펐다.

 

사육 불가의 요괴, 장장. 그는 요괴인 동시에 인간이 되길 원했다. 얻어맞고 다니는 약한 신인 동시에 사랑 때문에 불로불사를 포기한 미친 남자였다.

 

 

 

 

 

 

 

 

 

5장 엔딩

 

다음장

 

 

 

 

 

오백 년 전 만나 수백만 번 사랑한 내 연인

 

그대 닮은 사람 만났지만

 

아닌가봐요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낭만적인 헤매임

 

 

 

 

 

장장이 지껄이는 노랫소리를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번졌다. 이대론 죽이기 전에 죽겠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할 겨를 없이 몸이 앞서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맨발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성한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괴물보다 빠를 순 없었다.

 

 

 

다다미 바닥 위가 흙천지였다. 장장 손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그가 아귀 힘을 풀자 간신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내 눈앞에 미닫이 문이 열렸다. 장장의 다리가 눈앞에서 멀어졌다. 그가 한빈의 가방을 들어올리자 노란 부적이 돈다발처럼 쏟아져 나왔다.

 

 

 

바닥 냄새를 맡던 장호가 어느 부근에 툭, 멈춰섰다. 기다란 다다미 판을 드러내던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와…….”

 

 

 

짧게 탄성을 뱉은 그는 무릎을 세워 앉았다. 목덜미를 쓸며 경련하는 눈가부터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내 실성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무바닥의 커다란 구멍 내부. 죽은 여우의 뼛가루, 햇볕에 바짝 말린 닭, 벼락 맞은 나무, 심장이 찔린 짚인형까지.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가 칼집으로 다다미 아래 작게 난 구멍을 헤집었다. 짚인형이 튀어올랐다. 손을 뻗은 한빈이 인형을 주워 등 뒤로 숨겼다.

 

 

 

“인형 놀이 좋아하나봐.”

 

“……어쩔 수 없었어.”

 

“이걸로 되겠어?”

 

 

 

장호는 잘 알았다. 그걸로 안 된다는 것을. 하짓날로부터 보름 전. 여우의 뼛가루를 묻어 저주하면 여우가 서서히 사지의 감각을 잃고 죽는다는 저주. 웬만한 저주는 오백 년을 살아온 그의 귀기(鬼氣)에 기별도 안 갔다.

 

 

 

무언가 장호의 등을 때린 것은 그때였다. 장호가 눈길을 틀었다. 비어있던 곳에 누가 서 있었다.

 

 

 

“얜 뭐야?”

 

 

 

피투성이 영산이 주먹을 쥐고 떨고 있었다. 느닷없는 장난질에 장호는 느릿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한빈이 달고 온 잡귀였고 신경조차 안 쓰일 만큼 미미한 귀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몰라서 그래?”

 

“알아야 돼?”

 

“알고 싶지 않아?”

 

“…….”

 

 

 

무언가를 계산한 듯한 한빈이 말을 덧붙였다.

 

 

 

“이름이 영산이야.”

 

“…뭐?”

 

“어린 노비였고 말을 못 해.”

 

 

 

그 말에 장호의 낯빛에 당황이 일었다. 계산에 성공한 한빈은 작게 입꼬릴 올렸다.

 

 

 

“너….”

 

 

 

장호는 그의 의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내도록 의심하던 성한빈이 가짜가 아니었다. 오백년 전 사랑했던 연인의 현신이 눈앞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찰나 얼이 빠진 장호가 손을 뻗자, 한빈이 말허리를 잘랐다.

 

 

 

“넌 아직까지 이 산에 있는 이유가 뭐야? 그리고….”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났어? 왜 나야? 이전생에도 날 죽여놓고 다시 왜 또 날 죽이려고 해? 왜 날 괴롭혀?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장호가 횡설수설하며 눈알을 굴렸다.

 

 

 

“……아니야.”

 

 

 

그는 산만하게 좌우로 돌아다니며 손톱을 씹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댔다.

 

 

 

“지키지 못 한 거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가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사별 후 미친 왕이 환상을 본 것처럼.

 

 

 

“난 아무것도 기억 못 해. 니가 나 같으면 믿겠어?”

 

 

 

따지고 드는 말에 그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잊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를 잊을 리 없다고 그랬잖아. 이에 한빈이 고갤 돌리며 코웃음쳤다. 뭔 소리야.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이런 데에 날 불러낸 놈을 어떻게 믿냐고.”

 

“……”

 

“인간도 아닌데 인간 행세한 너를 어떻게 믿어? 가짜는 너잖아. 내가 아니라.”

 

“…….”

 

“뭐, 내 몸에 죽고 못 사는 거 보니까. 연애라도 하자고 불렀어? 그런 건 아니지?”

 

“…….”

 

“내가 너랑 어떻게 사랑을 해.”

 

 

 

허공에서 시선이 엉켰다. 장호의 입매가 천천히 무너졌다. 사랑이 전부인 그에게 독화살 같은 말이 날아와 박혔다.

 

 

 

“어떻게 해야 믿어줄 거야…….”

 

“너 믿을 일 없어.”

 

“나 미워하지마….”

 

“그렇게 못하겠는데?”

 

 

 

옅게 가슴팍을 들썩인 한빈이 숨을 삼켰다. 울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자꾸 나올 것 같았다.

 

 

 

“난 니가 역겨워. 왜인줄 알아?”

 

“…….”

 

“가짜라서. 괴물이라서.”

 

“…….”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싫었어?”

 

“어.”

 

“좋았던 기억은 없어?”

 

 

 

자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아랫입술을 씹은 한빈은 말을 뱉었다.

 

 

 

“없어.”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응.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난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고 해야 할 게 많거든.”

 

 

 

그 말을 듣자 장호는 문가에 기댄 채,

 

“그럼 죽여.”

 

“…….”

 

“다 그만할래…….”

 

 

 

죽여달라고 했다. 오백 년, 한 나라가 세워지고 스러지는 시간. 한 나라의 역사가 지나갈 동안 연인을 기다린 남자가 마주한 건 질린다는 눈과 역겹다는 말이었다.

 

 

 

한 나라의 역사만큼 기나긴 사랑이 망하고 있다. 그가 물기에 짓물린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그냥 잊을 걸, 잊어서 미움 받지 말걸.”

 

“…….”

 

 

 

후회섞인 말을 뱉은 그가 벽에 머릴 대고 흐느꼈다. 조선에서의 사랑, 불과 천 일. 연인이 떠난 뒤 홀로 애끓던 고통스러운 여생, 수백 년.

 

 

 

차라리 네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낡은 세월을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너의 갈비뼈로 태어났으면 영원히 너를 안을 수 있을 텐데. 네가 나를 지금보다 소중히 할 텐데. 장장이 되고자 한 건 인간이 아니라 성한빈의 무엇이었다.

 

 

 

먹이든 연인이든. 장장이 한빈에게 제 무엇이 되어달라 했듯이. 인간으로 살며 남이 될 바엔 그의 일부라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잔병처럼 고갤 숙인 장호는 지난날 읊은 대사를 떠올렸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미 사랑의 역사를 사전처럼 가진 그였으므로.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하면 죽을 만큼 사랑한단 걸 보여주면 돼요. 이 사랑이 당신의 시야에서 빗나간다 해도 사라질 사랑이 아니니까요.」

 

 

 

과연 장호의 급소는 사랑이었다. 이 사랑이 망한 순간, 삶에 대한 미련이 잿가루처럼 타들어갔다. 실소를 흘린 장호가 고개를 들었다. 괘종시계 종소리가 울렸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었다. 그가 바닥 위로 칼을 던졌다. 칼집이 한빈의 발끝에 부딪혔다. 이내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생일 축하해.”

 

 

 

동시에 부엉이가 우우 울었다. 장호는 끝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마주하는 건 한빈의 몫이었다. 그의 눈에서 사랑을 읽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죽인다던 남자가 죽여달란 상황을 머리가 이해하길 거부했다. 칼을 쥔 한빈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듯 울었다. 이렇게 아픈 선물은 받고 싶지 않다.

 

 

 

“다신 만나지 말자….”

 

 

 

뜨거운 눈물이 볼 아래를 가로질렀다. 장장의 윤곽이 시야에 흐릿하게 맺혔다. 무겁게 들어올린 검날이 번뜩였다. 벽지 위로 피가 튀었다. 장장의 공허한 눈이 커진 건 그때였다.

 

 

 

한빈은 자신이 무얼 찔렀는지 무감했다. 장장이 무어라 대답한 것 같은데, 귀에 물이 들어간 듯 먹먹했다. 피와 눈물이 엉겨붙은 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졌다.

 

 

 

마당에 놓인 버드나무가 날선 바람에 흔들렸다. 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한빈은 이생이 아득해졌다.

' >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장특선 下  (0) 2024.09.16
장장특선 上  (0) 2024.06.01
성선설  (1) 2024.06.01
나르키소스의 연인  (4) 2024.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