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숲속에 까만 밤이 밀려왔다. 횃불을 든 밀렵꾼 무리가 숨죽이며 산비탈을 올랐다. 개중 지친 이들은 혀를 찼다. 요괴한테 홀려서 미쳤다지? 공부를 오래 해 그리 됐나? 엄동설한에 이죽대는 소리가 입김처럼 퍼졌다. 저열한 웃음이 땅에 흩어졌다.
요괴 하나에 온 나라가 들썩인 겨울이었다. 잡겠다고 조정에서 포상까지 내걸었다. 범을 사냥하는 것만큼이나 대대적인 수색이 삼 일 내리 이어졌다. 쉬지 않고 산을 타기엔 날이 험했고 수확 없이 배를 곯자 이탈자가 속출했다.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진 이상 오늘은 반드시 포획해야 한다고, 무리의 대장 김씨는 생각했다.
수풀 사이로 무엇인가 인기척을 낸 것은 그때였다. 김씨가 상체를 낮게 숙였다. 덩달아 포복 자세를 취한 시선들이 물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스물을 갓 넘겼을까. 밀을 빻아 지은 듯 고운 얼굴의 소년은 수풀을 헤치고 아찔한 절벽 앞으로 걸어갔다. 김씨가 손을 까딱이자 일제히 그를 향해 화살을 겨누던 순간. 등 뒤에서 벌어진 상황을 모르는 모양인지, 소년이 커다랗게 고함치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죽으면 넌 살 수 있어. 널 찾지 못할 테니 멀리, 명으로 가. 그리고… 다신 여기 오지 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초조했다. 소년은 일찌감치 이 사랑이 잘못 됐다는 걸 알았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사랑. 후환이 담을 넘고 저주가 뿌리 내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 했기에, 스스로 벼랑 위에 섰다.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삶에 대한 미련이 모래처럼 와르르 빠져나갔다.
‘가, 가 제발….’
그가 손을 내젓던 순간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뻗는 듯 하더니, 사방으로 피가 튀겼다. 화살이 정확히 소년의 심장에 꽂혀들었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에 무릎이 꺾였다. 짐짓 눈물이 일었다. 자꾸 어디론가 굴러가는 초점을 붙잡고, 자신을 애타게 끌어안는 이를 밀어냈다.
‘가라고….’
‘내가 어딜 가, 나 버리지 마…….’
피 묻은 손을 마주 잡고 뺨을 붙여오는 이의 이름은 장장.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었던, 사육 불가의 요괴.
‘가라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좀… 가, 가, 가….’
매정하게 말하면서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더없이 따듯했다. 유원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장장의 얼굴에 핏방울이 피어났다.
‘후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자, 그땐 인간으로 태어나서 넘치게 사랑 받아…… 장장.’
‘그때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해.’
‘그럴 리는 없어. 바로 알아볼 거야.’
입을 달싹인 소년이 기어이 벼랑에 몸을 던졌다. 그의 비단 옷깃을 부둥키던 장장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몰아치는 폭포 물살이 외마디 비명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년은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구는 이에 대해 인간 아닌 가짜를 사랑한 죗값이라 이를 터. 인간 아닌 삿된 것을 사랑해서 벌을 받은 그였다.
홀로 남은 장장의 머리 위로 하늘이 부서지듯 벼락쳤다. 마른 나뭇잎이 스산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 눈보라가 몰아쳤고 급기야 모든 횃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밀렵꾼들은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소란을 퍼뜨렸다. 저마다 눈이 먼 봉사처럼 펄쩍대며 캄캄한 숲속을 달아났다.
이 지긋지긋한 사랑 때문에 그 옛날 인적 드문 산을 떠나지 못한 요괴가 있다.
무언가를 오래 사랑해서 미쳐버린 장장은, 오백 년이 지나 한 남자를 만난다. 스스로 산산이 부서뜨리며 사랑을 주던 미련한 남자를.
알아본다 확신했던 그 약속을
추악하고 아름답던 이 사랑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잊어버린 건 아닐지…….
장장은 두려웠다.
-
해는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간다. 그 당연한 사실이 때때로 소름 끼치게 좋았다. 어디서 나고 어디로 가는지. 이따금 한빈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 하굣길엔 멍하니 해의 흔적을 구경했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태양을 집었다. 빛의 부스러기가 콧대 위에 고였다. 멍이 번진 볼 안으로 막대 사탕을 굴렸다. 멀리서 골대 그물이 출렁거렸다. 신발장을 나선 여자애들이 스탠드에 드러누운 한빈을 보고 수군댔다. 도련님처럼 생겨선 상놈처럼 맞고 다니는 한빈은 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무념했다. 대신 생각했다.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사채업자 형들을.
형들이 누구시냐. 인생의 쓴맛과 쇠맛까지 알려주는 백종원 같은 분들이다. 풍채마저 백종원을 빼닮은 형들은 한빈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누런 벽에 기댄 꼴이 흡사 송장이었다. 하지만 간헐적인 신음만 흘릴 뿐, 맷집이 좋은 건지 수치를 모르는지 죽은 듯 맞기만 했다.
뺨에 칼자국을 아로새긴 백종원 클론 하나가 코 밑에 검지를 갖다댔다. 형님 이 새끼 숨 안 쉬지 말입니다. 그러자 뒤에서 손짓했다. 나와봐. 용비늘로 뒤덮인 손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뒤진 척이야. 엉?’
억지로 턱이 들린 한빈이 눈을 치떴다. 터진 입술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킥. 웃음도 기침도 아닌 게 흘러나왔다.
‘이 새끼 쇼하네. 씨팔 지금 나랑 드라마 찍니?’
배를 짓누르는 구둣발을 응시하던 시선이 올라갔다.
‘얼굴이 이러니까 뭘 해도 막, 드라마 같고 그렇죠….’
‘뭐?’
조곤조곤 개기는 얼굴에 두려움도 비굴함도 없었다. 외려 시건방이 흘렀다. 백종원 클론들은 서롤 응시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대가 어느 땐데 찾아와서 사람을 패세요… 요즘 아동학대 빡센 거 모르나. 업데이트 좀, 하시지.’
얼굴은 순정 만환데 말본새가 느와르였다. 부서진 몸을 일으켜 세운 한빈이 잇새로 혀를 찼다. 그리고 덧붙였다.
‘죄송한데 제가 아동이라, 이러시면 신고할 수 밖에 없어요.’
‘신고? 이 씨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조기교육 빡시게 받았네. 안 그래도 애새끼 패널티로 식구들 안 데리고 소수정예로 왔구만. 아그야. 형님 교육 들어간다 말 잘 들어라. 경찰이랑 제일 친한 게 누군줄 알어? 깡패야, 깡패. 응?’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쾅쾅 부서져라 문을 두드렸다. 일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두드림은 점점 거세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이윽고 경쾌한 초인종이 울렸다. 이런 씨팔 새끼가…. 두 시선이 한빈을 향하자, 한빈이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아동 학대. 특수 폭행. 형사 합의금.
‘빚 갚으라면서요.’
열여섯의 성한빈은 깽값으로 빚을 갚는다. 맞는 건 돈을 버는 일이니 괴롭기보단 즐거웠다. 수갑을 차고 나가는 놈들을 향해 손 흔들며 배웅했다. 경찰들은 한빈을 보고 신인류를 마주한 듯 기함했다. 얻어터진 얼굴이 겁대가리를 가져본 적 없는 듯 말갰다. 고작 중딩이 경찰차를 대동해 깡패를 쓸어버리자 동네가 술렁였다. 밑바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난놈이 태어났다고.
난놈은 깨진 식기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으며 담담히 생각했다. 불시에 또 찾아와 깨부시겠지. 그릇들은 미리 베란다에 처박아놔야겠다. 사실 메마른 편이 아닌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밑바닥에서 태어나면 밟히는 게 익숙하니까.
피 묻은 하복을 벗어 통돌이에 넣고, 베란다 난간에 기대 필터를 머금었다. 떨리는 손가락 틈으로 담뱃불이 타올랐다. 눈앞에 초고층 주상복합의 불이 하나둘 켜졌다. 이곳에서 몇 정거장 지나면 부촌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은 왜 전부 높고 먼 곳에 있을까. 해와 고층빌딩이 그랬고 엄마가 그랬다. 밑바닥에선 올려다볼 게 산더미였다. 그러니 올려다보는 눈은 한빈의 상징이었다.
그 눈을 보며 남자는 말했다.
“너 한 번 해볼래?”
등나무 아래로 큰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한빈의 체육 선생이었다. 한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베개 삼았던 가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멍든 목덜미를 멋쩍게 쓸며 말했다.
“저는 자세가 좋은 것도 아니고….”
빨간 호루라기를 맨 선생이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가 권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양궁이었다.
“자세는 배우면 되는 거란다.”
슉. 슈웅. 그가 유치한 소릴 내며 허공을 향해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넌 바람에 저항하고, 멀리 볼 줄만 알면 되는 거야.”
한빈은 눈이 좋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볼 수 있었다.
“멀리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응?”
“지금 바로 옆에.”
린넨 원피스 입은 여자가 당신을 끌어안고 있는데.
“옆에 뭐가? 뭐 묻었니?”
불현듯 선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빈을 반듯하고 활기찬 예스맨으로 알았을 터. 교무실 너머로 볼 때완 달랐다. 애가 묘하게 차분했다. 게다가 한빈은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곤란하단 얼굴로 고갤 갸웃댔다. 이내 선생과 허공을 번갈아 보았다. 선생의 시선이 따라갔다. 옆은 말 그대로 허공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대화 상대가 자신이 아닌 듯했다.
-
손가락이 핸들을 살포시 두드렸다. 약지에 웨딩링이 번뜩였다.
“어머니랑 잘 이야기 해 봐. 시청 지원은 쌤이 되게 해볼게.”
차량용 액자가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비스듬히 틀어진 액자를 멍하니 응시하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으로 빗줄기가 죽죽 쏟아졌다. 경사가 심한 둔덕에 삐죽빼죽한 빌라들이 드러났다.
오늘은 너네끼리 마셔. 재영이 보러 가야지. 소개는 무슨. 야 이 새끼야, 잡소리 할 거면 끊는다.
차가 천천히 붉은 빌라 앞에서 멎었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액자가 멈췄다. 리넨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비쳤다. 선생은 새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는…
“여기지? 들어가, 한빈아.”
외로운 사람이었다.
“없어요 저도.”
“응?”
“얘기 할 엄마가 안 계세요.”
굳이 그 말을 왜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덤덤하게 말을 뱉은 한빈이 창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내내 하늘을 보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는지, 선생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핸들을 고쳐잡았다.
“얼굴은 왜 그러니?”
“…넘어졌어요.”
한빈은 뒷통수만 보이며 대답했다. 눈도 좋은 애가 넘어졌댄다. 짧게 한숨을 쉰 선생은 낡은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현관 앞에 절름발이 남자가 비에 젖은 이불을 걷고 있었다.
“저희 아빠예요.”
뒤통수가 가지런한 아빠. 트럭에 다리가 구겨진 아빠. 매질 한 번 안 해본 아들을 남의 손에 넝마로 만든 아빠. 사랑하는 아빠.
맞은 편에서 번뜩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방금 내 표정 별로였지? 사과할게.”
“이런 얘기 하면 다 그러셔요 뭐….”
“전혀 몰랐다, 쌤이 실언했어.”
“아니에요. 일상이라.”
“…….”
선생은 선뜻 말을 잇지 못 했다. 둘 사이로 나지막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원래 상처가 많을수록 더 반짝거리는 거야.”
“….”
“네 눈이 그래.”
“제 눈요?”
“쌤이 눈 하나는 좋은데, 너는 다르다. 한빈아.”
그런가요.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반짝이는 눈으로 꿈을 바라보면.”
“….”
“가는 길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어.”
눈이 빛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한빈의 눈길이 선생을 향했다. 정말 그럴까? 사랑하는 연인이 따라다니는 것도 못 보는 남자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될까.
한빈은 머리 위에 손우산을 하고 꾸벅 인사했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대뜸 차안에 머릴 밀어넣었다.
“아직 회사에 있대요.”
“응?”
“재영님 괴롭힌 사람. 책상 서랍에 업무용 폰 있으니까, 카톡 한 번 켜보시고.”
“….”
“쭌아 너무 오래 아프지 마. 사랑해.”
라는데요. 꿈 주신 보답이에요. 그러면서 민망한 듯 머릴 긁적였다. 양궁 협회 팜플렛을 손가락에 끼운 채였다. 불현듯 선생이 싸한 차안을 돌아봤다. 이어 몸을 기울이고 차창 너머로 소리쳤다.
“내일부턴 넘어지지 마라!”
목발을 짚은 남자, 한빈의 아버지가 비에 젖은 이불을 안고 한 발로 뛰었다. 사춘기 아들이 누구와 함께 집 앞까지 올지는 몰랐던 탓이다. 한빈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
“같이 가.”
자연스레 이불을 받아 든 한빈이 그를 부축했다. 종알종알 말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나 양궁 해볼까? 그거 뭐, 돈 많이 드는 거 아니냐? 아냐 아빠. 거기서 지원두 다 해 준대. 부모 앞에선 영락없는 아이였다. 쇳소리 나는 문을 열자 헤진 우유 봉지가 펄럭였다.
신발을 벗은 한빈이 앉은뱅이 상 위에 팜플렛을 올려 놓았다. 열넷의 나이였다. 꿈이란 건 놔두면 무겁고 커진다는 걸 몰랐던 때였다.
-
양궁 도구를 들고 빌라 앞을 나섰다 돌연 길을 틀었다. 야트막한 뒷산이었다. 열아홉의 12월 말,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는 탓에 짐을 줄여야 했다.
뒷산을 내려오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나 고목을 붙았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빨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눈물을 닦았다. 집은 한결 넓어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꿈은 인생에 자리를 차지하는 거구나.
하지만 꿈은 자꾸만 쌓여가는 짐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대학생도 아닌데 대학교 앞을 지나다 명함을 받았다. 신생 소속사였고 연기 학원에 등록해 주었다. 투자 차원이랬다. 이후 번번이 오디션을 낙방한 끝에 첫 필모를 만들었고, 독립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탔다. 이제 작품이 없어도 연기 학원 알바로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상을 탄 날엔 원대한 꿈도 일기에 적어내렸다. 죽기 전에 남우주연상 타보기. 팬카페 회원 500명 넘기.
대본을 쥐고 칫솔을 물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한빈씨 우리 학원 파트 말고 개인 과외 할 생각 있어? 누가 한빈씨 작품을 인상 깊게 봤대.]
네 저야 시켜주시면 감사하죠! 팔 안에 대본을 끼운 채 타자치던 순간이었다. 금이 간 거울 위로 난데없이 빨간 형체가 비쳤다. 미간을 구긴 한빈이 불시에 뒤돌았다.
이지가 흐리고 불분명한, 구천을 오래 떠돈 귀신이었다. 어린 아이인지 키가 유달리 작았다. 피칠갑을 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는 귀신은 한빈을 끈질기게 쫓아왔다. 맥도날드 창가에 앉아 햄버거를 먹을 때도 가로등 아래를 걸을 때도. 자꾸만 따라왔다. 양궁 선생님도 그렇고, 귀신이 붙는 건 이유가 있었는데.
너는 누구야? 이름이라도 말 해봐.
공원 공중 화장실. 환풍기 팬이 부산스레 돌아갔다. 한빈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꿇어앉았다.
해코지 하는 건 아니지? 그럼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힘을 실은 투에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어둑한 전등만 깜박였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빈이 화장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아이가 앞을 막아섰다. 돌아선 아이는 먼지가 하얗게 쌓인 화장실 유리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영산.
아이의 이름은 영산이었다.
그래 영산아.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난 해결해줄 능력이 없어. 따라오지마. 하지만 영산은 계속 쫓아왔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팔을 내저었다.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는 모양새였다. 멀리서 스탭이 한빈에게 고함쳤다.
혼자 뭐 해?
머쓱해진 한빈이 대본을 품에 안고 달려갔다. 영산이 온 그날. 못내 이상한 꿈까지 꾸었다.
모르는 남자가 눈 내린 숲에서 너절하게 울고 있었고, 그에 안긴 한빈은 두개골이 빠개질 듯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쏟았다. 커다란 폭포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이내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인상을 쓴 한빈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고통은 생생했고 장면은 차갑고 신령스러웠다. 연예인인가? 보았던 드라마인가? 대본집에 남자의 얼굴을 그리다 관두었다.
남자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성한빈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그날 아침 한빈은 거울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눈두덩이가 무덤처럼 부어있었다. 물을 폭포처럼 틀어놓고 한참 멍했다.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고 모든 게 꿈인 듯 하다가도 선명했다.
아… 왜 이러냐.
본 적도 없는데 그리워져 막막했다. 목구멍부터 답답함이 치밀었다. 주먹이 가닿는 대로 심장을 때렸다.
그날 저녁. 열린 안방문 틈새로 티비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늬들이랑 무슨 재밀 본다고 이러고 있냐. 아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앙칼진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늘어진 티를 입고 설거지하던 한빈은 대사를 노래처럼 중얼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달그락대는 그릇에서 거품이 튄 방향으로 고개를 떨구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작은 손이 한빈의 팔목을 현관으로 잡아끌었다. 영산의 손에 이끌려간 곳은 진관사 아래 사찰음식집이었다. 한빈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도 오래된 노포처럼 생긴 가게의 이름은 귀옥이었다. 지도에는 없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끼긱 신경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은 들여다 본 한빈이 퍼뜩 어깨를 털었다. 박제된 여우가 벽에 납작하게 매달려 있었다. 동물을 이렇게 함부로 박제해도 되는 건가. 의문하던 그때였다.
“게 서서 뭐 해.”
푸성귀를 다듬던 백발의 노파는 태연히 말했다. 알던 사이처럼, 수저통에서 손수 수저를 꺼내주며 턱짓했다.
“뭘 멀뚱히 있어. 이리 와 앉어.”
그녀가 내놓은 수저는 두 짝이었다.
“…저 혼자인데.”
“둘인데.”
“네?”
동시에 영산이 익숙하다는 듯 옆에 앉았다. 얼결에 착석한 한빈이 제 눈을 의심했다. 메뉴 이름이 하나같이 이상했다. 해주 복수 재회. 이름을 곱씹던 한빈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좌식 테이블에서 얼굴에 시뻘건 화상을 입은 남자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대낮에 빛이 들어오는 가게 안에 손님들이 전부 그림자가 없었다. 그러니까, 모두 귀신이었다.
제 아무리 귀신을 보는 성한빈이라도 귀신을 대접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의식한 순간부터 공기가 못내 기이하고 매스꺼웠다. 괘종시계 시침이 심장을 두드렸다. 참다 못한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은 밖에 있나요? 손 씻고 싶어서….
반찬까지 금세 내놓은 탓에 나가기 애매했다. 궁색하게 말을 덧붙이자, 구부정한 허리를 편 노파의 칼끝이 주방 너머 문을 가리켰다. 이내 그녀는 한빈의 등 뒤로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고됐을 거야. 오기까지.
네?
커텐을 걷던 한빈이 돌아보았다. 적막 사이로 노파는 심드렁히 마늘을 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
확실한 건 이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사방에 향을 피우는지 연기가 가득했다. 한빈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팔을 내저었다. 누가 목덜미를 쓸듯 바람이 지나갔다.
무언가에 어깨를 부딪친 건 그때였다. 오래된 골동품인지 낡은 구리로 된 소재였다. 한빈이 찬찬히 뒤로 걸으며 그 앞에 섰다. 이어 덜컥 입을 막았다.
그것은 거울이었다. 구리 거울 너머로 자신과 똑닮은 남자가 비쳤다. 흙밭에 굴렀는지 넝마가 된 비단옷. 피 흘리며 우는 얼굴. 그 아래 깎아지른 절벽. 한빈은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었다.
거울은 업경대(業鏡臺)라는 이름으로, 전생의 죄와 업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성한빈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커텐을 걷고 뛰쳐나와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뒤에서 스텐 바구니를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다 봤구나.”
한빈이 천천히 돌아섰다. 거기서 뭘 보아야 했던 건지. 내게 왜 이러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일었다. 표정조차 흐릿할 만큼 주름진 얼굴에서 이유 모를 기백이 느껴졌다.
“…열어주세요. 문.”
“하늘도 무심하지. 너 같은 자에겐 망각이 독인 것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화라도 내려던 차였다. 불현듯 한날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잊은 듯해 한참을 괴로워했던 때. 꿈을 꾼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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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거짓이라 여겼다. 남들이 믿지 않는 귀신을 보면서 그랬다. 그래, 전생과 귀신이라는 게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대체 이 귀신은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걸까. 한빈이 영산을 내려다보았다.
“널 모시던 너희 집 관비. 벙어리인 탓에 양반집을 전전하다 니가 거뒀지. 영산이란 이름도 네가 지어줬고.”
“이렇게 작은 아이가… 노비라구요?”
“못 먹어 그러지 열은 넘었어.”
“…….”
“피칠갑을 한 이유는… 네가 죽을 때, 얘도 죽었거든.”
한빈이 무어라 입을 벙긋하던 그때. 노인이 말허리를 잘랐다.
“성유원. 평생 선을 베풀었는데 돌아온 건 화뿐이었지. 그건 다 네가 네 집에 영물을 들였기 때문이라.”
“지금 무슨 말을….”
일시에 그녀가 도마 위에 올린 닭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빈이 고갤 피했다. 닭피가 도마 위를 붉게 적셨다. 매섭게 치뜬 눈이 한빈을 향했다.
“네가 영물을 들인 후로, 네 어미는 광증에 걸려 부락을 떠돌다 얼어죽고, 가축은 굶어 죽고, 종들은 화적떼 습격으로 불에 타죽었어. 하지만 그 영물만은 아직까지 살아있지. 뻔뻔하게.”
가문에 깃든 저주였노라고, 그녀가 운을 뗐다.
전생의 네 할아비 되는 자. 그자는 명과 조선의 국경에서 여우와 범의 씨를 말려 비싼 값에 가죽을 팔아넘기는 이였어. 양반이었지만 장사치나 다름없이 탐욕을 부린 탓에 고을 내에 악명이 높았지.
너희 집은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고 해서 호성가라 불렸어.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모든 생명엔 혼이 있고 귀기(鬼氣)가 있는 법인데, 이를 무시하고 밤낮으로 살생을 일삼았으니……. 저주가 들 수 밖에. 설상가상 조부가 죽은 후 무지한 네가 여우누이를 들였고, 결국 저주는 일가뿐만 아니라 고을 전체로 퍼져 마을 일대가 떼죽음을 면치 못했지.
이윽고 그녀는 장장을 소개했다.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라고.
“그놈이 누군지, 이미 넌 알고 있어.”
“….”
“만났고 말고. 현실보다 현실 같았던 몽중에.”
그 순간 한빈이 어깨를 흠칫 털었다. 불현듯 허벅지가 진동했다. 휴대폰 알람이었다.
[한빈쌤. 지난 번 말했던 과외 학생 프로필 이제 보내드려요.]
문자엔 프로필과 함께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훑은 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 남자였다. 꿈에 나타난 남자. 꿈으로 느꼈던 기시감은, 헛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한빈은 알 듯했다. 자신이 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꿈이자 전생. 망각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장난이었다.
“아직도 유인 당하는구나.”
노파는 듬성듬성한 아랫니를 드러내며 혀를 찼다. 나무 도마 위에서 칼이 서걱서걱 움직였다.
“결정을 해야할 게야. 이생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
멀뚱히 있다 죽음을 맞이할지, 뭐라도 해 볼지. 수챗구멍 같은 귓속으로 그녀의 말이 흘러들어왔다.
그 자식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괴물이야. 사람이 되기 위해 500년을 살아냈지. 그 간악한 것은 널 사랑한 적 없어, 언제나 살기 위해 이용할 뿐……. 이 말을 꼭 기억하렴. 사랑한 적 없다고. 절대… 속아선 안 된다고.
이제 가슴 아팠던 이유를 알았다. 연정이 아니라 저주였고 그리움이 아니라 한이었다. 사랑이 이렇게 뼈 아플 리 없다.
“제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 건가요. 한빈이 묻던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남자 둘이었다. 그들의 손엔 총을 맞았는지 너절하게 늘어진 여우 사체가 있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잘 봐 둬라.”
“네?”
여우 사체가 철장에 처박혔다. 남자 중 하나가 여우의 털이 묻은 손으로 한빈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간 드라마가 얼마나 미화를 해둔 건지. 외모가 엉망진창인 도깨비였다.
“할 수 있겠지?”
“…….”
군살이 잡힐 정도로 투박한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유분방하고 누런 덧니를 드러내며 묻는 말에 한빈은 어색하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죽일 수 있겠냔 말이었다. 못할 게 무엇인가. 인생에 판타지 좀 들어갔다고 사릴 자신이 아니었다.
-
내 인생에도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을까?
한빈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는 동화 작가였다. 동화책을 읽으면 동화에서 살고 싶었다. 성인이 된 한빈의 삶은 저주가 깃든 동화가 되었다. 그것도 밑바닥 동화.
현관에 들어서자 목덜미가 서늘했다. 주방과 거실에 이어진 책장에서 책이 툭 떨어진 건 그때였다. 여우전이란 제목의 고전 동화였다. 우리집에 이런 책이 있었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우전을 펼치자 한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부근에 페이지가 딱 다섯 장 뜯겨 나가 있었다.
불현듯 고개를 돌리자 안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너울거렸다. 퍼뜩 쫓아나갔다. 멀리서 키가 큰 남자가 유유히 길을 나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점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소실 된 5장
미련한 클로버
창밖이 시끄러웠다. 바깥에서 창문을 두드려댔고 유리창 부딪치는 소리가 대포 쏘듯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은 한빈은 대강 시간을 가늠했다. 한 시간 정도 됐나. 이쯤되면 노력이 가상했다.
한빈은 이불 속에 몸을 옹송그린 채 눈을 굴렸다. 미닫이 문을 걸어 잠그자 아침부터 장호가 창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밥 안 먹어? 너 좋아하는 밥.”
“어.”
“나는. 나 안 보고 싶어?”
창문에 실눈을 들이댄 장호가 한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보지 마.”
“어떻게 보는데 내가. 나 되게 이쁘게 보는 중인데 너.”
“미친놈.”
장호는 진심이었다. 하얀 옆태가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백 년이 아니라, 천 년도 기다릴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가짜라도 아름다웠다. 장호가 창에 입김을 불었다. 한빈의 유려한 콧대 굴곡을 따라 손가락으로 창문을 쓸었다.
“왜 맨날 가래.”
“보기 싫으니까.”
“와~ 완전 상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냥 죽여 날….”
어제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겨운 초야였다. 첫경험을 남자 아니 남자도 아닌 것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피곤에 절은 얼굴이 끔찍한 듯 입술을 씹었다. 반면 창틀에 턱을 괜 장호는 나긋하게 웃었다.
“살이 찢어지는 것보다 뒤가 뚫리는 게 무섭구나 성한빈은.”
“…….”
“좋다.”
순간 이불을 걷어찬 한빈이 쉰 목소리로 뇌까렸다.
“…또라이야? 꺼져.”
장호가 고개를 갸웃댔다.
“또라이? 좋은 거야?”
“하… 그래. 좋은 거니까 많이 해 다 해.”
“웅. 이렇게 잘생긴 또라이랑 친하게 지내.”
진득하게 애교가 묻은 투였다.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자뻑이었다. 한빈이 이불 속에서 소리쳤다.
“가라고 좀!”
“웅~ 잘자 우리 아기. 잘 자고 건강해서 나랑 또 떡쳐야지.”
또라이를 모르는데 떡치는 건 알고 있는 이상한 요괴였다. 건성으로 손을 흔든 장호가 뒤돌았다. 그리고 한량처럼 잔디를 가로질렀다. 은은하게 기분 좋은 티를 내는 게 배알이 꼴렸다. 아기 취급은 뭐지. 스물이 넘은 건장한 남자에게 아기라고 할만 한 이는 부모밖에 없다. 내 부모라도 되나. 부모를 자처하는 그의 머릿속엔 지난 밤 엉망이 된 성한빈이 있을 텐데.
마지막엔 붙잡고 빼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혼 빼놓고 느낀 순간이 떠오르자 수치심이 일었다. 창 너머로 새가 깍깍 울었다. 그마저 장장의 희한한 웃음소리 같았다. 한빈은 소리 없는 악을 쓰며 귀를 막았다.
“나도 한다고. 연기인가 뭔가.”
“…….”
오늘 무슨 날인가 의문했다. 왜 돌아가면서 사람 속을 뒤집을까.
미닫이문에 불량스레 기댄 장소정을 어이 없다는 듯 훑었다. 남매가 이렇게 성격이 달라도 되는 건가. 장호가 감추는 일의 귀재라면 장소정은 감정을 전혀 숨길 줄 몰랐다. 그녀가 숨길 줄 아는 건 등 뒤에 있는 것뿐이었다.
“나 시급 비싸. 얼마 줄 건데.”
“얼마 필요한데?”
“먼저 제시해.”
“이걸로 퉁쳐.”
그녀의 등 뒤에서 나온 건 세잎 클로버였다. 한빈이 제 손바닥에 올려진 세잎 클로버를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개그하냐. 네잎도 아니고 세잎 클로버는…….”
“우리 집엔 토끼풀 많이 안 나. 귀한 거야.”
자랑하듯 말하는 그녀를 나지막이 응시하던 한빈이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내 마른세수를 했다. 애가 자존심도 세면서 하는 짓은 은은하게 푼수였다. 이거 뭐 어쩌라고…. 돌아가면서 골을 때리네.
“너 뭐… 금쪽이야?”
“뭔데 그건. 좋은 거야?”
요즘 유행어는 따라잡기가 왜 이렇게 힘드니. 한빈이 황당한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귓등을 긁었다. …금 들어갔으니까 좋은 건가 보지?
불현듯 기시감이 일었다. 남매는 남매라고, 한빈은 생각했다.
“나도 할래.”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접근금지 처사를 받아놓고, 문이 열리자 냄새 맡은 동물처럼 뻔뻔하게 쫓아온 장호가 빙글거렸다. 내가 좀 귀한 편이라.
한빈이 한숨을 내쉬자 둘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귀가 밝은 동물처럼. 고개를 퍼뜩 움직이는 꼴이 영락없는 남매였다. 걸음이 빠른 것도, 맥락 없이 고성방가를 하며 오페라를 부르는 것도, 고상하게 커피나 와인을 마시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닮아 있었다. 한 핏줄이 분명했다. 성한빈 골을 때리는 게 유전인 핏줄이었다.
“무슨 얘기 해.”
장호가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장소정이 삐딱하게 받아쳤다.
“니 얘기 안 해.”
둘은 서로를 마뜩잖게 응시했다. 한빈은 묵묵히 한 핏줄의 생쇼를 관람했다.
“우리 되게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빨리 나가줄래?”
“웃기네. 니가 무슨,”
“맞아.”
한빈이 말을 보탠 건 그때였다. 둘의 눈이 마치 작품 밖 작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 휘둥그레졌다.
“나가줘.”
드물게 당황한 장호가 뒤로 걸었다. 그러다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약 올리는 표정을 지은 소정이 그를 밀어냈다. 미닫이문이 세게 닫혔다. 후련한 듯 손을 턴 그녀는 방을 훑는 체했다. 이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 순간 한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를 따라 장소정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아는 거? 니가 나 보자마자 연못에 처박은 거. 그거 하나 아는데.”
“….”
“그러니까 괜한 걸로 힘 빼지마. 난 너 몰라.”
한낮의 연못에 빠진 장소정을 구해주던 얼굴도, 꽃잎 같은 풀이라며 토끼풀을 좋아하던 얼굴도, 전부 그대로였다. 정말 똑같았다. 성유원인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럴 때면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장호가 애먼 놈을 불러들여 헛짓거리 하는 게 아닌가 혼돈이 올 정도로.
“기억 안 나? 니가 나 엄청 좋아했어. 좋아 죽었지 아주, 피곤하게.”
그래서 장소정은 오빠의 기억을 훔쳐 연인 행세를 했다. 어차피 기억 못하니 추억이야 훔치면 그만이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연못은 우리 추억이 있는 곳인데. 물맛 그리울 때 안 됐니? 또 빠지고 싶으면 말 해. 내가 원래 사람이 힘이 넘치고 그러거든.”
“그래? 힘이 넘치는구나….”
한빈의 눈길이 장소정을 훑었다. 장호와 다른 듯 닮았다. 그래봤자 유사품이지만. 침대에서 벗어난 한빈이 반팔 위로 체크 셔츠를 걸쳤다.
“넌 흙맛이 그립나 보네.”
“뭐?”
“미안. 하는 짓이 너무 험해서, 사람 아닌줄.”
손뼉을 친 그녀의 얼굴에 기이한 화색이 돌았다.
“너 연기 진짜 잘하는구나?”
한빈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여기 오지 않았겠어?”
고개를 기울인 장소정은 똑소리 나게 혀를 굴렸다.
“여기 온 이유가 뭐야?”
“장호가 불러서.”
그 순간 장소정은 깨달았다. 그를 바보 취급 했지만 뭘 모르는 건 자신이었다. 그의 말은 거짓이다. 불러서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온 것이었다. 한빈이 짧은 탄성을 뱉으며 뒤돌았다.
“그리고 난 행운 좋아해.”
장소정이 기가 찬 듯 헛웃음쳤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세잎 클로버를 노려보았다. 저 하얀 얼굴로 속이 시꺼먼 걸 생각하니, 어쩐지 깜빡 속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침대 너머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장호가 아닌, 장호를 닮은 얼굴. 이 얼굴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 항상 두 번째였다.
‘유원은 내가 몇 번째로 좋아?’
‘음….’
‘나보다 장장이 더 좋아? 나는 두 번째야?’
대답 같은 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거칠게 문을 연 그녀가 자리에 멎었다. 눈앞에 귀신처럼 장호가 서 있었다.
“내 행세를 하네.”
“깜짝아.”
“난 깜짝이가 아닌데. 깜찍이면 인정.”
“제발 닥쳐. 어디까지 들었어?”
“뭘 들어?”
“썅… 뭐 믿을 놈이 있어야지.”
장소정이 나오라며 손사래쳤다.
인간 행세를 하는 장장. 장장 행세를 하는 장소정. 불량품이 판을 치는 이곳에서 유일한 진품은 성한빈이었다.
진짜와 가짜
산 아래는 말이 시내지 촌구석이었다. 20년 전 사거리에 터를 잡은 분식집엔 드문드문 손님이 앉아 있었다. 장호와 한빈. 둘은 구석으로 향했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간간이 무리 지어 들어왔다.
쇠젓가락을 든 장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접시에 담긴 익힌 돼지 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며칠 전 코피를 쏟았을 때, 한빈은 아연실색했다. 피 흘리는 사람 앞에서 아래를 세우는 놈은 처음 봤다. 개버릇 남 못 준다고 껍데기만 인간이었다. 그래서 데리고 나왔다. 많이 먹으라고. 저녁 시간이 지난 탓인지 학생보단 커플이 많았다. 허파 많이 먹으면 바람 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테이블 너머로 농담을 던졌다. 커플이 꺄르르 웃어 넘어갔다.
“나 바람 나도 돼?”
그 광경을 보던 장장은 너스레를 떤다. 익숙하게, 사람처럼.
“바람은 허파를 먹어야 나는 거고.”
“…….”
“넌 간 먹어야지. 좋아하는 거 많이 먹어.”
벌겋게 흠뻑 젖은 간. 인심 후한 주인 아주머니가 가득 뿌려준 떡볶이 소스. 장장은 묘한 얼굴로 한빈을 응시했다. 이윽고 주위를 훑다가 한빈에게 속삭였다.
“먹여줘.”
“뭐?
다정히 서롤 먹여주는 커플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가 포크로 간을 찍어 한빈을 향해 내밀었다. 한빈이 멀뚱히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나도 애기야!”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500살짜리 애기를 쳐다보았다. 유리에 바람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만큼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커플이 먹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학생들은 마시던 물을 도로 뱉었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던 사장은 소름 끼친 듯 어깨를 털었다.
“싫어?”
“싫어.”
“왜.”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없으면 먹여 줄 거야?”
에어컨 온도가 내려갔나. 섬찟해진 한빈이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이 덜컹 흔들렸다. 너 언제 사람 될래? 옆에서 사랑 싸움이 발발했다. 그들은 사람됨을 논했다. 장장이 돌발 행동을 한 건 그때였다.
“얘도 안 되고 싶겠어요?”
“야!”
한빈이 대신 사과하며 입술 위로 검지를 붙였다. 쉿, 옆 사람한테 말 걸면 안 되는 거야. 유치원 교사처럼 어르는 투였다. 장장은 억울한 듯 입술을 비죽였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도 아니면서……. 흉내 내봤자 가짜 주제에. 진짜와 가짜는 사실 한빈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장호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딴 것에 집착하고 있다.
한빈이 찬찬히 입술 거스러미를 씹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 미친 남자가 갈구하는 무언가를 알게 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픈 이유는 뭐지? 그래서 불쌍하면 어쩔 건데. 간이라도 내줄 건가. 옛날에도 불쌍한 척으로 날 꼬여냈나. 기가 차고 황당했다. 아량이 넓다 못 해 원수까지 이해하려 드는 자신이.
“안 먹여주면 안 먹어.”
“안 먹여줄 건데. 안 먹을 거야?”
“응.”
“그럼 언제 사람 될래.”
장호가 스텐 물컵을 텅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더 해 보란 얼굴이었다. 은근하게 놀리는 말들을 여유로이 넘기는 건 끝났다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그의 표정 위로 균열이 갔다. 어느 틈에 표정을 갈아끼웠는지 그가 턱을 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람이 못 돼서 싫어?”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기이하게도 성한빈은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몸속의 장기 중 가장 뜨거운 곳. 심장이.
아파하는 그는 어딘지 안쓰럽다. 안쓰러운 모든 것은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성한빈은 지금 원수가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다. 그가 약해 보일 때마다 정작 약해지는 건 성한빈이었다.
입술을 달싹대던 한빈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포크 허리를 엄지가 하얘질 만큼 눌렀다. 잠자코 감은 눈 속에서 눈알을 굴렸다. 문득 어떤 충동이 일었다.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죽고 싶었다. 포크에 찔려 죽은 사람이 있나?
잇살을 깨문 순간. 손바닥 위로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불현듯 눈꺼풀이 트였다. 한빈의 손을 든 그가 포크에 걸린 간을 삼켰다. 뒤이어 우물우물 씹으며 읊조렸다.
“이건 맛이 없네…….”
“…….”
“더 맛있는 거 없나아.”
고상하게 혀를 찬 장호가 메롱했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들이 장호를 지나쳐갔다. 가게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날이 화창해서 햇살이 따사로워서 죽고 싶을 만큼 아주 좋은…….
그런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콱 죽어버리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오늘 오후는 내내 사랑스러웠다.
공든 탑은 무너질까
보고 있자면 늪지에 턱끝까지 잠긴 듯한 영화였다. 영화 박쥐 속 뱀파이어 이야기는 감정선이 기이하고 공감이 어려운 소재였다. 한편 타성에 젖은 장장이 티브이 볼륨을 최대치로 키웠다. 주인공 김옥빈이 동네 지붕들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송강호가 그의 뒤를 쫓았다.
너 맛있자고 몇 명이….
자꾸 인간적으루 생각하지 마, 인간도 아니면서.
장장은 영화와 대본집을 비교하며 고요하게 대사를 읊었다. 모노드라마처럼 홀로. 그건 마치 제 안의 두 존재가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뭐야, 우리가?
뭐긴 뭐야. 인간 먹는 짐승이지. 여우가 닭 잡아 먹는 게 죄야?
장장을 울린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여우가 닭 잡아 먹는 건 죄가 아니지만, 사람을 먹어야 사람이 된다는 아이러니가 뾰족하게 그를 찌르는 모양이었다. 곧 사람을 죽일 거면서 이렇게 연민이 헐값이어서야. 신이 혀를 찰 만큼 마음 약한 요괴였다.
한빈은 안겨드는 장장의 정수리 위에 턱을 얹었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티브이 화면을 응시했다. 해피버스데이, 태주씨. 이내 대사를 따라 읊는 장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까만 눈에 슬픔이 있었다. 막막하리만치 커다랗게 고인. 건들면 곧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데? 왜 내 무덤에 메밀꽃을 올려두고, 멋대로 그리워하고……
컵을 쥔 한빈이 상념을 삼켰다. 자신을 죽이고도 이런 얼굴로 슬퍼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의 슬픔이 상스러워 보였다. 악어의 눈물이자 짐승의 연민 아닌가. 위선이었다. 하지만 상스러운 존재는 사랑스럽다는 걸, 결핍을 안은 존재야말로 아름답다는 걸. 성한빈은 알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장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장의 눈길이 서서히 떨어졌다. 한빈의 콧대를 지나 입술로.
“할 말 있어?”
시선을 견디다 못한 한빈이 물었다.
“할 말?”
지상파 채널에서 애국가가 고요히 흘렀다. 바깥은 빗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사 절까지 마친 애국가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마치 심장이 멎은 소리처럼 삐 소리가 적막을 채울 때. 장호가 말했다. 그거야 맨날 있지. 뭔데?
“뽀뽀 해달라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한빈의 상체가 모래성처럼 뒤로 무너졌다. 성한빈은 모래성처럼 대충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인데. 장장은 매순간 성한빈이란 공든 탑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뽀뽀 끝나지 않았어?”
장장의 볼에 묻은 입술이 웅웅거렸다. 말간 얼굴로 떠보는 투가 천연했다. 한 손으로 한빈의 배꼽 아래를 지분대던 손짓이 멎었다. 장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의 의도가 모호했다. 다 하지 않았냐는 말인지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말인지. 아마 전자일 터였다. 장장이 기운 빠진 듯 웃었다. 그리고 쏟아지듯 한빈을 끌어안았다.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너 이틀 뒤에 생일이라고 했지.”
“응. 왜?”
“내가 선물 줄게.”
“…뭔데?”
“그때는 웃어줘….”
그게 무슨 말이야.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마가 떴다. 한빈이 의문하며 고개를 내렸다.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장장이 부드럽고 순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포근한 숨소리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토록 무방비한 순간을 그를 만난 이래 본 적 없었다.
불현듯 한빈이 그의 두꺼운 목을 그러쥐었다. 이내 서서히 힘을 주면서, 숨이 멈추는 걸 기다렸다. 잠든 그가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잠자코 내려다보던 한빈이 갈빗대에 귀를 붙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한빈이 그랬던 것처럼, 심장이.
당연한 소리지만, 그에게도 심장이 있다. 늘 제멋대로에 갈피 따위 잡히지 않는 그에게도 심장이 있다. 고작 목을 쥔 것뿐인데 심장까지 움켜쥔 듯한 기묘한 감상이 일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기묘한 전능감이 전신을 싸고 돌았다. 사실 장장을 만난 후로 정상이란 터널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터널 밖은 하얀 연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지금 성한빈의 시야는 흐릿했다. 하지만 흐릿한 와중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리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기이한 이끌림에 시달릴 것을. 몇 번의 생을 거쳐 널 만나면, 나는 전혀 면역이 들지 않은 몸으로 다시 무너질 것을. 살아도 죽음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감정을 우리는 타액으로 나눌 것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웠다. 한빈이 장장의 목을 감싸 안고 짧게 입을 맞췄다. 요괴와의 입맞춤은 이골나게 달아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꿈 미래 안정 성공. 이런 희망적인 단어들은 너무 쓴맛이 나서 입에 넣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쓴 게 좋다는 걸 알지만 어린아이처럼 괜스레.
비련의 클로버
하늘이 깨진 듯 천둥 소리가 울렸다.
한빈은 무덤에서 일어나듯 발작하며 깨어났다. 어느새 아침이 왔다. 새벽부터 비가 온 탓에 공기가 쌀쌀했다. 간밤에 장호가 덮어준 모양인지 얇은 모포가 손에 잡혔다. 불현듯 뺨이 간지러웠다. 볼 위에 손을 얹던 그때였다.
두 손가락에 무언가를 잡은 한빈이 눈썹을 내려뜨렸다. 네잎 클로버였다. 착잡한 숨을 내쉬며 눈두덩이 위에 손등을 얹었다. 잇새로 쇳소리가 삐져나왔다.
“누가 이런 거 해 달래…….”
“우리 집에 이거 많이 없어. 열심히 찾은 거야.”
“…….”
“행운을 빈다, 그런 뜻이니까.”
쇼파등에 턱을 괸 장호가 윙크했다. 족보도 없는 똥강아지가 그려진 티를 입고. 한빈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다. 그렇게 웃기 시작하더니 한참을 실성한 듯 웃었다. 장호는 뿌듯한 듯 마주 웃다가, 계속되니 민망한 듯 귓등을 긁었다. 그제야 웃음을 그친 한빈이 눈가를 훔쳤다.
왜 나의 행운을 빌지? 나의 행운은 너의 죽음인데.
친절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의 행운인데. 그걸 부추기는 너라니. 모순이다. 기쁘라고 가져온 선물에 입매가 일그러졌다. 마음 약한 건 장장만이 아니었다.
한빈은 쇼파 구석에 놓인 대본집을 펼쳐 클로버를 끼워넣었다. 이내 책 모서리에 입술을 박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후 내내 꾸벅꾸벅 졸다 보면 어느새 꿈속을 걸었고 결국은 벼랑 앞이었다. 번쩍 놀라며 눈을 떴다. 유리문으로 툭툭 물방울이 튀었다. 하늘이 뭘 아는지 종일 비바람을 퍼붓고 있었다.
한빈이 쇼파 밑으로 미끄러지듯 발을 내렸다. 자꾸 애먼 놈에게 나를 바치고 싶어지는 건 무슨 감정일까. 모를 일이었다.
그즈음 성한빈에게 새로운 특기가 생겼다. 생략과 시치미였다.
행운이 온다
모든 존재가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갈 뿐.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한빈은 그 말을 불경처럼 입에 붙였다. 신념과도 같았던 연민을 버리는 연습을 했다.
왜냐면 비극 속 비련의 주인공은 사절이니까. 비극이 주는 역겨운 오르가즘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거니까. 성한빈은 바꿔야 한다. 불운을 행운으로. 비극을 희극으로. 진창을 천상으로. 이 장르는 성한빈의 손으로 바꿔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낮이 길고 밤이 짧은 6월의 하지였다. 행운이 오는 날은.
달이 뜬 시각. 살금살금 복도를 거닐었다.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는 형광조끼 둘에게 멀리서 옷을 벗는 시늉을 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캄캄한 밤중에 저 조끼는 눈에 띌 공산이 컸다. 하지만 알아먹지 못한 모양인지, 저들끼리 막 소란을 냈다. 이어 하나는 계단을 올랐고 하나는 한빈을 향해 걸어왔다.
더 큰 소리가 나기 전에 발을 내딛던 한빈이 발소리를 죽이며 멈춰섰다. 덧니가 의아한 듯 그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한빈이 먼저 가라는 듯 턱짓했다. 작게 열린 미닫이문에 등을 댄 덧니가 귀를 갖다댔다. 그 순간 불현듯 머리 위로 기척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성한빈. 드디어 제 발로 온 거야? 내가 보고 싶어서.”
분명히 침대 위에 있어야 할 장호가 그곳에 있었다. 어둠을 헤집은 장호가 덧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내 모양새를 면밀히 살피더니 혀를 찼다.
“…아니네? 성한빈이?”
“윽!”
목이 졸린 덧니가 무작위로 총을 난사했다. 침대 너머 유리창이 깨졌다. 목재가구에 총알이 박혔다. 총알이 장호의 팔뚝을 스친 건 그때였다. 그는 구멍난 팔뚝을 무감하게 내려다보고 덧니의 목울대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짐짓 모가지가 비틀린 덧니가 허공에서 발버둥쳤다. 쥐고 있던 단총이 툭 떨어졌다. 장호는 느릿하게 총을 줍고 방을 나섰다.
“성한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성한빈 어디 갔어. 나 달래줘. 누가 나 때렸어.”
기다란 복도를 거닐었다.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복도 창틈으로 연거푸 바람이 불어왔다. 커텐이 흩날렸다.
“숨은 거야? 숨었으면… 잡히지 마.”
유인하는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슬펐다.
사육 불가의 요괴, 장장. 그는 요괴인 동시에 인간이 되길 원했다. 얻어맞고 다니는 약한 신인 동시에 사랑 때문에 불로불사를 포기한 미친 남자였다.
5장 엔딩
다음장
오백 년 전 만나 수백만 번 사랑한 내 연인
그대 닮은 사람 만났지만
아닌가봐요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낭만적인 헤매임
장장이 지껄이는 노랫소리를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번졌다. 이대론 죽이기 전에 죽겠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할 겨를 없이 몸이 앞서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맨발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성한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괴물보다 빠를 순 없었다.
다다미 바닥 위가 흙천지였다. 장장 손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그가 아귀 힘을 풀자 간신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내 눈앞에 미닫이 문이 열렸다. 장장의 다리가 눈앞에서 멀어졌다. 그가 한빈의 가방을 들어올리자 노란 부적이 돈다발처럼 쏟아져 나왔다.
바닥 냄새를 맡던 장호가 어느 부근에 툭, 멈춰섰다. 기다란 다다미 판을 드러내던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와…….”
짧게 탄성을 뱉은 그는 무릎을 세워 앉았다. 목덜미를 쓸며 경련하는 눈가부터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내 실성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무바닥의 커다란 구멍 내부. 죽은 여우의 뼛가루, 햇볕에 바짝 말린 닭, 벼락 맞은 나무, 심장이 찔린 짚인형까지.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가 칼집으로 다다미 아래 작게 난 구멍을 헤집었다. 짚인형이 튀어올랐다. 손을 뻗은 한빈이 인형을 주워 등 뒤로 숨겼다.
“인형 놀이 좋아하나봐.”
“……어쩔 수 없었어.”
“이걸로 되겠어?”
장호는 잘 알았다. 그걸로 안 된다는 것을. 하짓날로부터 보름 전. 여우의 뼛가루를 묻어 저주하면 여우가 서서히 사지의 감각을 잃고 죽는다는 저주. 웬만한 저주는 오백 년을 살아온 그의 귀기(鬼氣)에 기별도 안 갔다.
무언가 장호의 등을 때린 것은 그때였다. 장호가 눈길을 틀었다. 비어있던 곳에 누가 서 있었다.
“얜 뭐야?”
피투성이 영산이 주먹을 쥐고 떨고 있었다. 느닷없는 장난질에 장호는 느릿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한빈이 달고 온 잡귀였고 신경조차 안 쓰일 만큼 미미한 귀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몰라서 그래?”
“알아야 돼?”
“알고 싶지 않아?”
“…….”
무언가를 계산한 듯한 한빈이 말을 덧붙였다.
“이름이 영산이야.”
“…뭐?”
“어린 노비였고 말을 못 해.”
그 말에 장호의 낯빛에 당황이 일었다. 계산에 성공한 한빈은 작게 입꼬릴 올렸다.
“너….”
장호는 그의 의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내도록 의심하던 성한빈이 가짜가 아니었다. 오백년 전 사랑했던 연인의 현신이 눈앞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찰나 얼이 빠진 장호가 손을 뻗자, 한빈이 말허리를 잘랐다.
“넌 아직까지 이 산에 있는 이유가 뭐야? 그리고….”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났어? 왜 나야? 이전생에도 날 죽여놓고 다시 왜 또 날 죽이려고 해? 왜 날 괴롭혀?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장호가 횡설수설하며 눈알을 굴렸다.
“……아니야.”
그는 산만하게 좌우로 돌아다니며 손톱을 씹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댔다.
“지키지 못 한 거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가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사별 후 미친 왕이 환상을 본 것처럼.
“난 아무것도 기억 못 해. 니가 나 같으면 믿겠어?”
따지고 드는 말에 그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잊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를 잊을 리 없다고 그랬잖아. 이에 한빈이 고갤 돌리며 코웃음쳤다. 뭔 소리야.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이런 데에 날 불러낸 놈을 어떻게 믿냐고.”
“……”
“인간도 아닌데 인간 행세한 너를 어떻게 믿어? 가짜는 너잖아. 내가 아니라.”
“…….”
“뭐, 내 몸에 죽고 못 사는 거 보니까. 연애라도 하자고 불렀어? 그런 건 아니지?”
“…….”
“내가 너랑 어떻게 사랑을 해.”
허공에서 시선이 엉켰다. 장호의 입매가 천천히 무너졌다. 사랑이 전부인 그에게 독화살 같은 말이 날아와 박혔다.
“어떻게 해야 믿어줄 거야…….”
“너 믿을 일 없어.”
“나 미워하지마….”
“그렇게 못하겠는데?”
옅게 가슴팍을 들썩인 한빈이 숨을 삼켰다. 울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자꾸 나올 것 같았다.
“난 니가 역겨워. 왜인줄 알아?”
“…….”
“가짜라서. 괴물이라서.”
“…….”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싫었어?”
“어.”
“좋았던 기억은 없어?”
자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아랫입술을 씹은 한빈은 말을 뱉었다.
“없어.”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응.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난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고 해야 할 게 많거든.”
그 말을 듣자 장호는 문가에 기댄 채,
“그럼 죽여.”
“…….”
“다 그만할래…….”
죽여달라고 했다. 오백 년, 한 나라가 세워지고 스러지는 시간. 한 나라의 역사가 지나갈 동안 연인을 기다린 남자가 마주한 건 질린다는 눈과 역겹다는 말이었다.
한 나라의 역사만큼 기나긴 사랑이 망하고 있다. 그가 물기에 짓물린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그냥 잊을 걸, 잊어서 미움 받지 말걸.”
“…….”
후회섞인 말을 뱉은 그가 벽에 머릴 대고 흐느꼈다. 조선에서의 사랑, 불과 천 일. 연인이 떠난 뒤 홀로 애끓던 고통스러운 여생, 수백 년.
차라리 네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낡은 세월을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너의 갈비뼈로 태어났으면 영원히 너를 안을 수 있을 텐데. 네가 나를 지금보다 소중히 할 텐데. 장장이 되고자 한 건 인간이 아니라 성한빈의 무엇이었다.
먹이든 연인이든. 장장이 한빈에게 제 무엇이 되어달라 했듯이. 인간으로 살며 남이 될 바엔 그의 일부라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잔병처럼 고갤 숙인 장호는 지난날 읊은 대사를 떠올렸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미 사랑의 역사를 사전처럼 가진 그였으므로.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하면 죽을 만큼 사랑한단 걸 보여주면 돼요. 이 사랑이 당신의 시야에서 빗나간다 해도 사라질 사랑이 아니니까요.」
과연 장호의 급소는 사랑이었다. 이 사랑이 망한 순간, 삶에 대한 미련이 잿가루처럼 타들어갔다. 실소를 흘린 장호가 고개를 들었다. 괘종시계 종소리가 울렸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었다. 그가 바닥 위로 칼을 던졌다. 칼집이 한빈의 발끝에 부딪혔다. 이내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생일 축하해.”
동시에 부엉이가 우우 울었다. 장호는 끝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마주하는 건 한빈의 몫이었다. 그의 눈에서 사랑을 읽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죽인다던 남자가 죽여달란 상황을 머리가 이해하길 거부했다. 칼을 쥔 한빈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듯 울었다. 이렇게 아픈 선물은 받고 싶지 않다.
“다신 만나지 말자….”
뜨거운 눈물이 볼 아래를 가로질렀다. 장장의 윤곽이 시야에 흐릿하게 맺혔다. 무겁게 들어올린 검날이 번뜩였다. 벽지 위로 피가 튀었다. 장장의 공허한 눈이 커진 건 그때였다.
한빈은 자신이 무얼 찔렀는지 무감했다. 장장이 무어라 대답한 것 같은데, 귀에 물이 들어간 듯 먹먹했다. 피와 눈물이 엉겨붙은 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졌다.
마당에 놓인 버드나무가 날선 바람에 흔들렸다. 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한빈은 이생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짐승보다 더 섬뜩한 인간을 마주했다. 기골이 장대한 것도 잔인한 무기를 든 것도 아닌데 눈짓 하나로 묘하게 압도가 되는, 그런 남자가 인적 드문 산에 있었다.
퍼진 차처럼 누워있던 성한빈이 손차양을 만들었다. 삼림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내려왔다. 교통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무른 땅을 밟고 미끄러졌다. 그 뒤로 한참이나 기절한 게 성한빈의 오늘 일정 전부였다.
담배 연기처럼 하얀 연무에 쌓인 남자는 성한빈 앞에 발등을 세워 앉았다. 그 모습이 신 같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뭐가 있지? 체감상 서양 신이 아니라 동양 신이었다. 고약한 둔갑술이 취미인 산신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맞고 다니는 신이었다. 신의 콧등은 죄 까졌고 굵은 목울대엔 벌건 멍이 묻어 있었다.
뾰족한 눈 앞머리. 무감한 동공. 보통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의뭉스런 남자는 주머니에 칼 내지는 총이 들어 있고 사람을 죽이는데. 샅샅이 훑어도 그저 흠씬 맞은 자국밖에 없다.
신이 좀 약한가?
출신이 하늘인지 땅인지 묻지도 않은 성한빈이 속단했다. 간단한 짐만 챙긴 채로 산행을 택한 성한빈은 조난을 당했다. 그리고 기절했다. 머리가 지끈대니 비현실적인 망상이 가지를 뻗었다. 깨어난 뒤로 줄곧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하얀 뺨을 어루만지다 중얼거렸다.
“저 죽었나요…?”
“뭐?”
젊은 나이에 요절하셔서 이 꼴이신가? 죽어서도 일하는 한국 사회. 아무리 그래도 저승사잔데 약이나 좀 발라주지 상처가 이게 뭐야. 이승이나 저승이나 복지가 영….
남자는 내내 성한빈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아, 뇌까렸다. 이내 한빈처럼 자신의 성치 않은 뺨을 어루만졌다.
“비싼 얼굴에 누가 낙서했다, 그치.”
하하하하. 능청스레 고갤 젖히며 웃는 남자. 웃을 때마다 붉은 목울대가 두껍게 불거졌다. 그 꼴을 하고 스스로를 품평하는 여유마저 비친다. 정상이 아니었다.
한빈이 흙바닥에 손을 짚으며 앉은 채로 뒷걸음질쳤다. 동시에 주머니에서 떨어진 립밤이 남자의 발에 채였다. 그는 터진 입매를 개의치 않고 그 위로 허옇고 진득한 립밤을 발랐다. 립밤이 둥글게 입술을 짓누를 때마다 옅게 피가 번졌다. 한빈이 니베아 로고를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수십 번도 더 입술을 문댔던 그 자리에.
“피…….”
“멍.”
개새끼치고 단조로운 어투. 멍이라고 뇌까린 그의 시선이 한빈의 입술에 맺혔다. 한빈의 눈은 그의 입술의 핏길을 따라갔다. 불현듯 한빈이 혀를 깨물었다. 사후에도 고통이 느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벌어진 잇새로 통통한 혀에서 피가 비어져 나왔다.
“너 뭐 해.“
입술을 내려다 보던 남자가 박수쳤다.
”우와. 혀 씹네.“
”….“
”같이 씹자.“
그가 훅 입술을 디밀었다. 순간 한빈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볼에 흙을 묻힌 채로.
”미쳤어요?“
그 순간 발치에 탕, 탕 총알이 터지더니 흙이 하늘로 치솟았다. 나무 사이로 형광색 조끼를 입은 중년 남자들이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다. 야생동물보호협회. 손에 장총이 들려 있었다. 심장 언저리를 부여잡은 한빈은 손을 뻗어 인기척을 냈다.
“여기 사람 있!”
뒤에서 남자가 입을 막은 건 순간이었다. 차가운 뺨이 맞닿았다. 무겁게 눌러오는 상체에 한빈이 버둥거렸다.
“뭐 해요? 빨리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쟤네 보호 하는 애들 아니야. 총 들었잖아.”
“그럼 뭔데요? 조끼까지 입었잖아요!”
“고양이가 호랑이탈 쓰면 호랑이야? 보호가 아니라 사냥이야.”
“여기서 뭘, 뭘 사낭하는데요?”
“나?”
남자가 검지로 자길 가리켰다. 개새끼치고 상큼하게 웃으면서.
“그러니까 그쪽을 왜….”
“내가 탐나서?”
고갤 까딱거린 남자가 무릎을 잡고 일어섰다. 이내 휘파람을 불었다. 나뭇잎이 위아래로 살랑거렸다. 머리 위에서 부엉이가 우우 울었다. 울창한 삼림은 관객 없는 무대처럼 고요했다. 차라리 여기서 날짐승을 마주치는 게 덜 무서웠을 테다. 기운을 쓴 탓인가. 남자를 앞에 두고 배가 꾸르륵 울었다.
마른 뱃가죽을 어루만졌다. 몇 시간째 헤맸더라. 더럽게 고인 물웅덩이 위로 생채기가 난 뺨이 비쳤다. 한빈은 그 앞에 납작 엎드려 입을 축였다. 모래 알갱이가 거칠게 혀를 긁었다. 쌀이라도 되는 양 애타게 핥아먹었다. 뭐라도 먹어야 했다. 시체꼴 나지 않으려면.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기억을 되짚었다. 한빈이 이곳에 온 목적은 등산이 아니었다. 과외였다. 이 산중턱 어느 저택이, 한빈의 과외 장소였다. 연기 아카데미의 원장 권유였다. 한 달짜리 상주 고액 과외. 과외 상대는 젊은 20대 남자, 그는 연영과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출연 이력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
땅에 고개를 박은 한빈의 뒤에서 남자가 물었다.
“마시써?”
“제가 하루종일 길을 잃었어서….”
알만하다는 듯 끄덕였다.
“어쩐지 늦더라 선생님.”
“선생님?”
“응.”
남자는 엉뚱하고 살벌했다. 개새끼가 아니라 장호였고, 장호는 성한빈의 과외 학생이었다. 선생이랬다가, 반말을 찍찍 뱉다가, 오락가락하던 남자는 뒷짐을 지더니 이내 뒤를 돌아 오솔길로 발을 굴렸다. 그의 위로 독수리가 거칠게 날개짓하며 날아갔다. 문득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입금 내역을 떠올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인적 드문 산에서, 모르는 남자를, 너무 쉽게 믿어버린 것이다.
한빈은 경계 서린 눈으로 미지의 숲속을 훑었다. 날개가 반쯤 파먹힌 나비가 날아와 길을 인도하듯 앞장섰다. 나비의 날개는 절반이나 뜯겨 나가 있는데, 날갯짓은 힘찼다. 한참이나 오르막을 걷자 거대한 가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빈은 휘둥그레하며 중얼거렸다.
“한국식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적산가옥.”
“일본식?”
장호가 끄덕였다. 한국 산중턱에 일본식 가옥을 짓고 사는 중국인 남자. 기이했다. 성한빈은 제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이마가 깨진 이것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먹통이었다.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내내 몽롱한 것이 꼭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동화 속 성한빈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미 받은 돈을 뱉어낼 수도 없는 난감한 신세였다. 그때였다. 낯선 인기척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무성한 잔디 위. 구두 신은 여자가 무른 진흙을 밟을 때마다 질퍽질퍽 땅이 울었다.
“출소 축하해.”
길게 기른 검은 손톱을 한 여자는 그릇에 담긴 두부를 던졌다. 접시가 잔디 위로 퍽 떨어졌다.
“아, 탈옥인가?”
두부는 장호의 어깨를 맞고 으스러졌다. 무슨 상황이지. 한빈이 찌릿한 발끝에 힘을 줬다. 그녀의 말이 뾰족했다.
“또 누굴 낚아 오는 건지… 쯧.”
동물의 털처럼 적갈색 머리칼, 숯검댕이 눈썹, 눈밑 눈물점, 갸름한 턱. 한빈은 그녀와 장호를 한 시야 안에 넣고 바라보았다. 혹시 가족?
장호를 가증스럽다는 듯 바라본 그녀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저 아세요?”
짐짓 장호가 킥킥거렸다. 어깨 위에 으스러진 두부를 검지로 찍어 먹은 장호가 으, 비위 상하는 시늉을 했다. 옆에 선 여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금붕어야?”
“장소정.”
“뭐.”
장호와 의문의 여자. 둘은 말없이 서롤 응시했다. 무언가 부딪친 소리가 들린 건가 착각이 일만큼 거센 시선이었다. 한빈은 눈짓에도 완력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여간 인간들은 너무 멍청해.”
이내 장소정이 질렸다는 듯 손사래치며 뒤돌았다. 인간들? 한빈이 의문하던 찰나.
“미친년.”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한빈이 시선을 굴렸다. 장호가 귀찮은 듯 이마뼈를 긁었다.
“네?”
“나이 먹고 정신이 이상해졌어. 원래는 못되기만 했는데.”
관자놀이에 대고 검지를 빙빙 돌렸다. 이 집 남매는 오락가락 하는 게 유전인가. 애초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 예쁜 여자가, 그것도 자기와 무척 닮은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그리고 출소? 출소라고 하지 않았나. 탈옥은 또 뭐지?
“잠만요.”
한빈은 가옥 입구에서 한 발짝 멀어지며 말했다.
“아니 이거… 진짜 이상하잖아요. 그쪽 정체가 뭐예요? 직업은 있나? 이런 으스스한 집 살면서 노닥거리는 분이 무슨 연기를 한다는 게 좀 안 믿겨서요. 하다못해 변변한 직장이라도 있음 얘기 해 보세요 내가 정상참작 해줄테니까.”
“풉.”
“푸웁? 웃겨요 지금?”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가 입을 열던 순간 하늘에 마른 벼락이 쳤다. 눈두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한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이내 성긴 비바람이 불었다.
“지금부터 니 삶에 날 넣어.”
“이봐요.”
“장면엔 인물이 있어야 되잖아.”
“….”
“순서가 틀렸어. 넣기도 전에 왜 나를 알려고 하지?”
“알아야 넣죠?”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먼저 넣으면 안 돼?”
“미쳤어요?”
“먼저 넣는 게 좋던데.”
“…하.”
“넣는 거 허락해줘. 강제는 흥미 없어.”
미친 소리가 취미인 남자에게 그딴 건 통하지 않는다.
다다미 깔린 적산가옥. 열린 문너머 펄럭이는 서양풍 커튼. 깜박이는 형광등. 풀벌레 우는 소리. 제 발로 걸어왔으나 끌려온 듯했고 문은 열려 있으나 나가지 못한다. 자그마치 한달이나.
아득해진 한빈이 눈을 감자, 가옥의 미닫이 문이 양팔을 벌렸다.
일시에 장호가 부는 휘파람이 피리 소리처럼 들렸다. 잔혹 동화의 발단처럼 스산한 정경이었다. 그가 꼬여낸 건 뱀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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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억겁의 시간을 지나 감격적인 재회를 하신 소감이?”
와인잔을 입술에 댄 장소정은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있었다. 성한빈이 방안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팔짱을 끼고 화장대에 몸을 기댔다.
“확신 하는 모양이지? 내가 봐도 정말 닮긴 했어.”
와인잔이 원목 화장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가짜면 어쩌려고 집구석까지 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가짜면 진짜인 척을 해야지. 가짜인 적 없던 것처럼.”
장호가 벨트를 풀며 침대 위로 툭 던졌다. 이내 화장대 거울을 들여다 보며 멍든 볼에 혀를 굴렸다. 거울 끝에 걸린 장소정이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나도 미쳤지만 오빠도 정말 제정신 아니다.”
장호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내 뒤돌았다. 가짜면…. 양손을 폈다 구기며 입으로 앙, 하고 무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했다. 머리 위로 두 귀가 솟은 것은 순간이었다. 털빛이 붉은, 영락없는 여우였다. 장소정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다음 달이면 오백 살 먹는 놈이… 체통 없게. 징그러.
“죽일 거야. 날 속인 죗값을 치러야지.”
“걔가 속인 건 맞고?”
짙은 눈을 한 장호가 천연덕스레 묻는다. 그게 중요한가?
명나라에서 온 귀한 선물, 여우 장장.
그는 명에서 조선을 위해 특별히 선별하여 보낸 여우였다. 도적떼를 만나 명의 고서와 특산품들이 전부 약탈당하던 그때, 산에 숨어들어 벌벌 떨던 여우 누이를 아침 산보를 걷던 도령이 거두어 주었다. 도령의 이름은 성유원, 과거를 치르고 고향에 금의환향한 장원 급제자였다. 성유원은 자신이 거둔 여우들을 애틋하게 사랑하였고, 그중 여우 장장을 심히 아껴 취침 자리에도 끼고 돌았다. 기이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이 아이가 날 돌보는 것 같다는 농도 숱하게 던졌다. 비극이 덮치기 전까지.
도령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뒤, 고을엔 밤마다 구슬픈 여우 울음 소리가 들렸다. 고을이 떠나가도록 우는 탓에 여우는 한날은 돌을 맞아 다리가 부러지고, 활을 맞아 갈빗대가 찢어졌다. 그렇게 만신창이로 100년을 살았다. 죽는다는 의미를 몰랐기에 성유원을 찾아 헤맨 세월이었다.
여우가 100년을 살면 지혜를 깨닫는 눈이 뜨인다. 1000년을 살면 하늘과 통하여 간악함을 씻어내리고 산신이 된다. 천호의 절반을 살면 여우 생에 딱 한 번 인간이 될 기회가 주어진다. 오차 없이 500년의 삶을 산 날, 인간의 간을 먹으면 비로소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주인을 잃고 한이 맺혀 죽지 못하고 그대로 영물이 되어 불멸을 사는 여우. 그의 환생을 기다린 지 499년, 11개월째.
여우는 불멸을 끝내고 인간이 되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을 위한 불멸의 종말.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젠 대체 왜 나간 거야? 잡귀가 바글바글한 한양 땅에.”
장장은 좀전의 일을 회상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이들. 신라시대 <삼국유사>에 기록된 비형랑의 자손들. 반인반귀. 그러니까 귀신과 인간의 혼혈이었다. 그들은 무릇 악귀들이 그러하듯 인간 세상을 떠돌며 생과 사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한때는 조선의 서민들에게 도깨비라 불렸다. 사실 그들이 악명 높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귀옥이라는 귀신 감옥을 만들어 인간 세계에 머무는 모든 영물들을 잡아 가두고, 신기를 빼앗아 사자의 눈을 피해 영생의 삶을 취했다. 그들은 매일 밤 지상의 영물을 사냥한다. 겁도 없이.
“보고 싶어서. 빨리.”
“귀한 경험 했네. 님도 보고 감옥도 가고.”
밤중에 한양 땅에 들어선 장호. 달이 뜨면 활개치는 잡귀들의 밀고로 광화문 한복판에서 붙잡혔다. 그리고 하루 만에 탈옥하는 기염을 토했다.
“설마 인간이 되려는 건 아니지? 되고 싶으면 혼자 되라고. 나까지 휘말리게 하면 죽여버릴 거야.”
“…소정아.”
한숨 쉬듯 뇌까린 장장이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바짝 깎은 손톱이 일순 동물의 손톱처럼 뭉툭하고 길쭉해졌다.
“이제 우리 좀 죽자 소정아. 너무 오래 살았어.”
“…….”
“넌 욕심 너무 많아.”
“…….”
“그때도 그랬어. 항상 오빠 것을 탐냈지?”
“남매한테 니거 내거가 어딨어?”
“내가 조금만 불효자였으면 넌 그때 죽었을 텐데.”
“장호.”
”응. 장호는 너무 효자야~ 그치?”
섬뜩한 삼인칭 화법을 구사하는 장장.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장소정이 잇살을 지르물었다. 부드러운 말씨와 텅 빈 눈. 마주하는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차는 건 일생에 단 한 번뿐이었다. 취향이 자신과 같았다는 게 문제지만.
동생 장소정은 가질 수 없으면 장난감을 세게 쥐는 어린 아이처럼 괴롭히고 망가뜨렸다. 오빠 장호는 자신이 가지는 게 아니라 자신을 갖고 싶게 만들었다. 고약한 건 사실 장호였다. 그녀는 주먹이 새하얘질 만큼 세게 말아쥐었다. 수치심이 치민 듯한 얼굴로 뇌까렸다.
“그래봤자 짐승 새끼 주제에.”
“넌 내 동생이니까 새끼 짐승이고.”
“야!”
“그리고 짐승 새끼가 어때서. 난 성유원한테 이 말 들을 건데?”
장장이 괴물이라도 좋아♡
멋대로 성한빈을 상상한 그가 전매특허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젖히며. 하하하하.
“가짜면 볼만 하겠네. 오백 년을 썩어가며 기다렸는데 고작 데려온 게 엄한 놈이면.”
“가짜면 너 가져. 난 진짜만 가지거든.”
“죽여도 되는 거지?”
그 순간 팍, 작게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한빈의 방이었다. 둘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한빈이 작게 욕을 씹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들으려고 문을 열던 찰나 실수했다. 팔로 쳐버렸다. 당황한 듯 콧망울을 쓸던 한빈이 퍼뜩 일어났다. 이내 걱정섞인 얼굴로 갈아끼운 다음, 쉼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옆으로 문을 젖혔다.
“무슨 일 있어요? 큰 소리가 들려서…….”
모든 걸 들었음에도,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모르는 척 하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그렇게 의심하며 화를 내놓고도, 이제 와 아무것도 못 들은 듯이.
커다란 뱀술 진열장에 기대어 섰던 장호가 높은 천장 아래를 가로질렀다. 이내 서양풍으로 꾸며진 응접실에 놓인 가죽 쇼파에 턱짓했다. 한빈은 얌전히 앉아 그를 올려다 보았다. 둘은 동시에 서로의 표정을 읽었으나, 묘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없어요, 선생님.”
낯설게 존대를 뱉은 장호는 웃었고,
“…수업은 언제부터 할까?”
처음으로 반말을 한 한빈의 입꼬리는 굳어 있었다. 그는 들고 나온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진선규의 연기학개론. 한국영화 대본집.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쉬고 내일.”
다가선 장호가 자신의 다친 콧등을 검지로 찍어눌렀다. 덩달아 한빈이 기다란 속눈썹이 바짝 올라가도록 찡긋거렸다.
“그럼 저는…… 약속한 한 달 뒤면 집으로 가는 거죠?”
“응. 가야지.”
그 순간 몸을 일으킨 장호가 훅 얼굴을 들이밀었다. 몸을 붙이는 게 습관인가? 찰나 어깨를 움찔 틔웠다. 하지만 그는 쇼파 옆 협탁에 놓인 리모컨을 집었다. 자그마한 티브이 화면이 지지직거리다 켜졌다. 2000년대 초 가정집 안방에 있을 법한 뚱뚱한 티브이였다.
“본방 사수 해야 돼.”
“뭘…?”
“동물의 왕국. 이거 끝나고… 오늘 수요일이니까 9시 드라마.”
장호가 벽에 걸린 달력을 돌아보고 확인한 듯 끄덕였다. 산사람이라 그런가 취향이 영…. 혀를 내두르던 순간 장소정과 눈이 마주쳤다. 티브이엔 여우가 뱀을 잡아먹고 있었다. 사방으로 튀는 피. 입에 피칠갑을 한 여우 두 마리. 성한빈은 두 남매를 번갈아 보았다.
짐짓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유 모를 선득함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한빈은 아닌 척 대본집을 열었다.
다음날 거실. 낮.
감정 표현과 대본 분석을 하기 위해 모인 둘. 펜 뚜껑을 입에 무는 한빈. 장점 보완 및 단점 개선 사항들을 노트에 써내린다. 장점은 마스크. 단점은 우애앵.
대체 어떤 배우가 우애앵 하고 울어요?
난 이렇게 울고 싶어. 이게 귀여워.
귀여우려고 연기 하는 거 아니잖아요. 지금 애인이 칼 맞아 죽었는데 우애앵 울면 안 되죠?
나 귀여우려고 연기해. 나 맨날 귀엽고 싶은데? 슬플 때도 귀엽고 아플 때도 귀여울 거야.
내가 감독이면 그쪽 같은 사람 안 써요.
그쪽 아니고 장장.
(한숨 푹 쉬고) 뭐가 됐든 귀여운 장장 안 쓴다고요. 그리고 슬픈 거지 삐진 게 아니잖아요? 평소처럼만 표정 해도 되겠구만 생긴 게 서늘해서. 독백하면서 아랫입술 좀 그만 내밀어요. 감정선 다 무너지니까.
싫어 이거 내 트레이드 마크야. 그리고 슬퍼서 입술이 나오는데 그걸 내가 어또케.
고집 좀. 배우가 고집이 세서 되겠어요? 발음도, 외국인이라도 널 사랑해쏘쏘가 아니라 사랑했었어, 이렇게. 진짜도 지인~짜가 아니라 진.짜. 이렇게.
사랑 했 었 어 진 짜 사랑해 사랑했다고 사랑했어. 이제 됐어?
……. (잠깐 뜸 들이면)
너는 왜 가르치면서 애교 뿌리는데?
뭐요?
말 할 때 입술 이렇게 이렇게 내밀잖아. 뽀뽀 해달라는 거야?
햇살 떨어지는 창, 그림자가 커다랗게 일렁인다. 장호의 몸이 한빈의 코앞까지 기울었다.
다리 짧은 탁상 위에 널브러진 대본집. 궁, 아가씨, 시크릿 가든, 괜찮아 사랑이야 등등 한국영화 대본과 휴먼 멜로 드라마 대본들. 취향이 한데 섞여 있다.
스스로를 발랄한 신채경보단 차분한 이율에 가깝다고 말한 한빈. 그 말은 곧 장장의 비웃음을 샀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장장의 연기가 별로 안 괜찮아 패스. 시크릿 가든은 싸가지 김주원이 애교가 많아 실패. 아가씨는 이름에 이질감을 느껴 한빈이 거부했으나 아저씨로 이름을 바꾸고 시작.
하려고 했으나
저도 x이 나와서 아가씨를 먹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라는 대사는 좀…….
대사를 통째로 씹은 한빈 두고 장장이 태연하게 다음 대사를 이었다. 마치 들었다는 듯. 숨소리 섞어서.
나를 원하니?
내가 이렇게 해주면 좋아?
말해봐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난스럽던 모습은 어디 가고 물 흐르듯 차분한 투였다. 낮게 울리는 대사를 묵묵히 들고 있던 한빈이 대본을 펼친 채로 퍽 내려놓았다. 낱장이 와르르 쏟아졌다.
베드신은 좀 그러네요….
베드신만큼 감정 격할 때가 어딨어. 감정 표현한다며? 나 지금 감정 완전 좋아.
아 진짜.
너도 나한테 표현 좀 해.
장호가 느물대며 한빈의 어깨를 찔렀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비죽거린 한빈이 다시금 대본을 내려다 보았다.
저는 아저씨, 아저씨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버리지 않을래요
머뭇대던 한빈이 웅얼대듯 대사를 쳤다. 그의 아롱진 속눈썹을 내려다 보던 장호가 장면을 깨고 물었다.
“진짜야?”
“…에?”
“말투가 진심 같았어.”
“그건.”
얼빵하게 되물은 한빈이 말을 골랐다.
“제가 연기를 잘해서 그래요.”
흐음. 장호는 탁상 위로 비스듬히 턱을 괬다.
“배우들이 왜 사랑에 빠지는지 알겠다.”
“…….”
“진짜 같아서. 속는 거야.”
다 알았어, 눈을 가늘게 뜨자 마주 앉은 한빈이 기침했다.
“저는 절대 그런 감정 헷갈리지 않아요. 안 속거든요 잘.”
“그래?”
“장장은 속았나봐요.”
“응, 나 완전 속았어. 성한빈이 나 사랑하는 줄.”
“에이 그럴 리가. 공과 사는 구분하니까, 걱정 마요.”
빙긋대며 착한 웃음을 지은 한빈을 더러 장호가 낮게 속삭였다. 응. 절대 속지마.
“근데….”
“응.”
“뒤에 벌레.”
“으악!”
대륙을 횡단하듯 쇼파와 쇼파를 건너온 장호가 아이처럼 안겼다. 속지 말라면서 본인은 이런 하찮은 일에 속아 넘어갔다. 한빈은 쿡쿡 올라오는 웃음을 삼키며 넘어가는 몸을 손바닥으로 지탱했다.
“뻥인데요.”
“뻥인 게 뻥이지? 벌레 싫어어.”
초등학생 남자애가 할 법한 장난이었다.
“나도 뭐 하나 말해줄게.”
“뭔데요?”
“한빈 등에 빨간 귀신 있어.”
“……아.”
덥수룩한 뒷머리를 쓸어내리던 한빈이 등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봤어요? 우리 되게 친한데.”
의뭉스레 웃는 한빈을 보고 장호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불량품. 번듯하게 보여도 구석구석 나사가 빠져 있었다.
-
이른 아침. 기다란 복도로 나온 성한빈이 살금살금 허공에 손을 뻗었다. 짙은 연무에 휩싸인 소나무 장정 앞에서 휴대전화를 만졌다. 전원이 켜지자 전파가 터졌다. 황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 방의 미닫이문을 닫았다.
위치는?
정확히는 몰라요 그런데 야생동물 출몰 주의 표지판 바로 위였고 오솔길이 있어요 집 아래에. 집은 이층짜리 일본식 건물이에요 긴 복도가 있고 다다미가 깔린….
작게 속삭이듯 말하던 성한빈이 움직임을 멈춘 건 순간이었다. 문에 덧발린 반투명 쇼오지 위로 그림자가 비쳤다.
“엄마 잘 있어?”
이내 소리를 커다랗게 키웠다. 톤은 바뀌었다. 그는 핸드폰을 고쳐잡고 반대편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커텐을 쳤다. 그리고 가방에 손을 집어 넣어 노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아들 능력 있잖아 엄마. 엄마가 이렇게 잘생기게 낳고 잘 키워서.”
거울을 보며 덥수룩한 머리를 정돈했다. 어깨에 전화를 받치고 거울을 들어 밑에 무언가를 붙였다.
“응 엄마. 백내장 수술 요즘 별거 아니래. 너무 겁먹지 말고. 병원비 수납하고 나면 돈 좀 남을 거야. 그걸로 이번달 대출 이자 내자. 알겠지?”
또 침대 맡을 들어올려 무언가를 붙였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발로 치웠다. 걱정 어리고 섬세한 말투와 다른 몸짓이었다.
“응 그렇고 말고. 사랑해요 많이요. 나는 지금 과외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아.”
한빈이 닫힌 방문을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전화 화면은 꺼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대화는 끝이 났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문을 여는 소리였다. 장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한빈은 전화를 등 뒤로 숨기고 몸을 내밀었다.
“뭐 해요? 거기서.”
“과외 학생 등장했어.”
“뭐야. 다 들었어요?”
“들으라고 한 거 아니었어?”
뜨끔한 한빈이 핸드폰 액정을 바닥으로 향하게 뒤집었다. 뭐 이렇게 귀신처럼 눈치가 빠르지.
“바깥 구경 좀 해도 돼요? 제가 산책을 좋아하는데 안 나가니까 답답해서.”
장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끄덕였다. 그렇게 해. 한빈이 대뜸 물었다. 그쪽 몇 살이이에요? 왜 계속 반말해요.
말이 마당이지 사실 들판에 가까운 저택 앞을 나선 한빈은 그의 대답을 곱씹었다. 나이 엄청 많아. 나이 많다고? 한빈은 투덜거렸다.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백 살도 안 넘었으면서.
장호의 뒤를 좇아 도착한 곳엔 메밀꽃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새하얀 들판이.
“무덤 앞에 꺾어두던 꽃이야.”
“……무덤?”
“묘를 엄청 늦게 찾았거든. 찾은 뒤론 묏자리엔 하얀 메밀꽃 천지였어.”
“…….”
“가는 길이 따듯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사람이 나눠주던 온도만큼,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의 무감했던 눈에 슬픔이 어른거렸다. 벌 받는 아이 얼굴 같기도 했다. 그리움이라는 벌. 일시에 이유 모를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한빈은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응시하다 말했다.
“좋았겠어요.”
“응?”
“아직도 잊지 않아줘서, 엄청 좋을 것 같은데요… 저라면.”
“좋아?”
“네.”
“다행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낯선 표정이었다. 한빈은 엄지손톱 끝을 꾹꾹 눌렀다. 이상하게 가슴이 쿡 쑤셨다.
“사람들은 내가 나쁘대.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요.”
“…….”
“무언가를 오래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나쁘지 않아요.”
“…….”
“혐오보다 사랑이 더 어렵잖아요. 그걸 해낸 사람은 좋은 사람이죠.”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양궁을 했거든요, 그런데 양궁이 너무 좋아서 집에 독촉장, 납부 고지서가 날아오는데도 포기를 못 했어요. 무언가를 사랑할 때 저는 가장 나빠졌어요. 가족들을 고생시켰고…. 그래서 양궁을 혐오하려고 노력했어요 착하고 싶어서. 다짐한 뒤로 양궁 짐들을 다 가지고 나왔는데 버릴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산에다 묻었어요. 그 뒤로 한 번도 활을 못 만져 봤고요. 저도 마음 속에 묻은 거죠, 양궁을.
입을 달싹이며 한숨을 쉰 한빈은 엄지 거스러미를 툭 떼어냈다.
사랑하는 것을 묻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땅이든 마음이든. 그 어디에든.
대본의 낱장은 나날이 넘어갔다.
탁상 위로 대본을 툭 내려놓았다. 대본을 따라 충실하게 대사를 치던 장장도 어느새 감정선을 잘 따라갔다. 마지막엔 제법 몰입한 톤으로 대사를 치는 바람에 눈에 물기가 도는 걸 느낄 정도였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한빈은 귀를 긁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장호의 톤은 이제 제법 정극다운 구색을 갖췄다. 그의 입에서 가슴을 할퀴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일상의 장르가 비극으로 바뀌는 착각이 일 정도로.
수업이 끝난 후 한빈은 차가운 연못 안에 발을 담갔다. 비단잉어들이 바쁘게 물살을 갈랐다. 여러 갈래의 물길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하마터면 속을 뻔한 순간이 최근에 얼마나 많았던가. 그의 입에서 사랑의 말이 너무 많이 나와 그게 진심 같기도, 거짓 같기도 했다.
“살만한가봐?”
돌아보자 챙이 큰 모자를 쓴 장소정이 나무 정자 위에 걸터앉았다. 모호하게 푸르스름한 하늘을 등지고.
“성한빈.”
“….”
“너 장호에 대해 얼마나 알아?”
“뭐… 알아야 돼?”
헛웃음을 친 그녀는 발톱을 세우듯 목소릴 높였다.
“하,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
“간 파먹는 여우 얘기 같은 거.”
“…….”
고민하던 한빈이 자그맣게 고개를 젓는다. 장소정이 난색했다.
“싫다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어. 그 이야기가 재밌는진 내가 판단하는 거고.”
궁금해서 달려들 줄 알았나. 한빈이 속으로 코웃음쳤다.
“많이 발칙해졌네?”
“그런 편이야. 고마워.”
한빈의 어깨가 떠밀린 것은 순간이었다. 장소정이 구두굽으로 한빈의 등을 눌렀다. 커다란 연못에 빠진 한빈이 물 밖으로 팔을 뻗었다.
“힘 좀 길러야겠다 너!”
깔깔대고 웃던 장소정의 표정이 어딘가를 보곤 깨져버렸다.
돌계단을 건너 온 장호가 가죽장갑을 이로 벗었다. 오래 묵은 산신 같은 그의 취미는 현악기 연주와 검술이었는데 오늘은 검술을 하는 날이었다. 대검을 정자에 세워둔 그가 한빈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끌어냈다. 다정치 못한 손길이었다. 드러누운 성한빈 앞에 발등을 세워 앉은 그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정아….”
“빠지라고 민 게 아니라 그냥 툭 쳤는데 쟤가,”
“장소정.”
그간 봐온 장장은 건조할지언정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턱뼈가 불거지는 것을 보고 성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팔 밑단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겉잡을 수 없는 물길은 장호의 발치를 향했다.
“장소정?”
“어.”
“손님을 잘 모셔야지.”
“…….”
“사람 대접 받으려면.”
젖은 티셔츠를 짜며 서 있던 한빈에게 시선이 꽂혔다. 하얀 티셔츠인데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괜스레 민망해졌다. 유유히 집으로 들어서는 장호의 뒤를 쫓으며 모멸감 섞인 얼굴과 마주했다. 이상하게 우월감이 치밀었다. 괴상했다. 그 순간 성한빈은 황홀하고 치졸했다. 두 단어가 역설적으로 공존했다. 실존하는 감정인지마저 의심이 갔다.
기껏 따라갔더니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한빈이 차가운 타일 바닥에 발을 디뎠다. 수전을 올리자 수증기가 퍼졌다.
“뭐 해!”
온몸 구석구석에 물줄기가 쏟아지는 걸 보던 장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청소.”
“네?”
“허락 없이 멀리 나가지마 선생님.”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등을 연신 확인했다. 장소정의 굽이 닿은 곳이었다. 내가 선생이… 맞아? 선생이 이렇게 명령을 들어?
“잠만.”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한빈이 장호를 끌어당겼다. 당긴다고 고분고분 끌려온 장호의 몸도 서서히 젖어갔다.
“내가 선생이면 내 말 들어야지 왜 내가 듣는데.”
“선생은 원래 학생말 경청해.”
“그럼 학생은 뭐 해?”
“선생님께 헌신.”
“나한테 헌신할 거야?”
“할까?”
장호가 콧등이 맞닿을만큼 얼굴을 붙였다.
“싫어….”
개길 땐 언제고 쫄아붙은 한빈이 고개를 젖혔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하얀 목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핏대 선 목에 장호의 시선이 맺혔다. 이내 한 손으로 목덜미를 크게 움켜쥐었다. 엄지를 세워 경동맥 부근을 살짝 눌렀다. 옅은 기침을 뱉는 한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장호가 읊조렸다.
“이거 좋아했는데.”
“…큽, 내가 언제….”
“잊어버렸어?”
무슨 말이야? 성한빈은 그와 잔 적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가 누군가와 이 따위 행위를 했고, 그것을 떠올렸단 의미였다. 다른 사람을 회상하는 말. 머리 안에 꼽힌 나사가 픽 뽑히는 느낌이었다. 불쾌한 흥분감이 이는 동시에 묘한 질투심이 꼿꼿했던 이성을 충동질했다. 어딘지 맛이 간 눈을 한 한빈이 샤워 수전을 끈 건 그때였다.
“씨발….”
허벅지 사이로 까끌까끌한 체모가 닿았다. 허벅지 안쪽에 둥글고 뜨거운 것이 쓸고 지나갔다. 한빈이 상체를 바르작거리며 허릴 숙였다. 이내 벽에 머리를 박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쿵 소리가 멎자 눈을 뜨니 장호의 손이 벽을 짚고 있었다. 허벅지살이 자신의 것과 비벼지던 걸 까만 눈으로 응시하던 그가 아랫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젖혔다. 물안에서 대화하듯 낮고 축축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극에 약한 도련님이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작게 웅얼거리던 한빈이 손을 허우적대며 화장대를 짚었다. 거울 안에 붉은 홍조가 가득한 얼굴. 엉망이 된 자신의 꼴을 외면했다. 그러자 턱이 잡혔다. 손아귀 힘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물건의 상태를 살피는 듯한 손길이었다. 거울 속 한빈의 얼굴을 들여다 본 장호가 귓바퀴를 깨물었다. 이내 연골을 잘근 짓씹으며 읊조렸다.
“가짠가, 진짠가아….”
“하. 그만… 이거 그만해….”
호기롭게 욕실을 나올 땐 언제고 밀어내기 바빴다. 녹아내릴 듯한 몸을 간신히 화장대에 지탱하던 한빈이 침대 맡에 허릴 짚었다. 목덜미부터 팔, 가슴까지 전부 붉은 자신을 내려다 보며 울기 직전인 한빈을 보고 장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한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억지로 안 한다고 했는데 나도 급해.”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는 손길에 한빈이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아, 안 돼…. 벗겨진 바지를 주섬주섬 끌어올리다가 또 손이 붙잡혔다. 살면서 이렇게 수치스러웠던 적 있었나. 없었다.
“나 남자야. 남자라고.”
그래서 연달아 사족을 붙여 보았다. 설득시켜 달라는 듯 응석이 섞인 투로. 어느새 한빈의 위에서 가슴께에 입술을 지분대던 장호가 눈만 치뜨며 물었다.
“응, 너 남자야. 그게 왜?”
“좀 무서워….”
“안 무섭게 할게.”
천천히 옮겨간 입술이 마침내 닿은 곳은, 간이 있는 곳이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말간 얼굴을 마주했다. 순간 무언가 예고 없이 푹, 밀고 들어갔다. 한빈이 목을 한껏 젖히며 핏대를 세웠다.
“하으, 잠시만, 나 안 돼애… 다 망가져어….”
뭐가 다 망가진단 건지. 자신이 어거지로 넣고 있다곤 생각 못 하는 장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입구를 이미 적셔놓은 탓에 드나들 때마다 구멍이 따듯하고 습하게 오므라들었다. 귀두가 끝까지 들어가자 한빈의 몸이 바짝 굳었다.
보다 못한 장호가 한빈의 것을 움켜쥐었다. 귀두 끝부분부터 액이 나오는 구멍까지 엄지로만 어루만져 주었다. 감각이 한곳으로 과하게 쏠리자 아파서 흐느끼던 목소리가 차츰 앓는 목소리로 변했다. 기둥까지 쓸어내려 자극이 쏠린 바람에 한빈은 성기가 뿌리까지 밀고 들어온 것도 몰랐다.
한빈의 목소리가 안정되자 장호는 허벅지를 붙잡고 넓게 벌렸다. 앞에서 자꾸 바르작대는 탓에 움직이기가 불편했지만 그역시 이성이 휘발된 지 오래였다. 거의 짐승의 교접에 가깝게 결합 된 부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온몸이 빨갛지만 개중 이곳이 가장 붉었다. 예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움켜쥔 장호는 성기가 드나드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이내 입술을 씹으며 쓰러지듯 한빈의 위로 손을 짚었다.
“후….”
“으, 으응. 아….“
지옥 바닥을 기는 것 같은 섹스였다. 개처럼 흘레붙던 좀전은 어디로 가고 장호는 옅은 신음만 흘리며 고상하게 처박았다. 내벽 주름 하나하나를 느끼려는 듯 느릿하게 밀고 들어왔다 귀두를 미처 빼지도 않은 채 빡빡한 구멍에 쑤셔넣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굴러먹은 건지. 한빈은 능숙한 그가 괘씸해져 속으로 욕을 씹었다.
신원불명의 남자와 생애 첫 섹스를 한 성한빈. 이게 지금 성한빈 인생에 어울리는 문장인가? 눈앞이 흐려졌다. 분명 어떠한 목적으로, 목표물을 보며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한빈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양궁. 양궁할 때를 떠올리자.
스탠스.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 자세. 노킹. 일정한 현의 위치에 화살을 끼우기. 셋업. 몸이 흐트러지지 않게 활을 들어올리기. 드로잉. 양팔에 동일한 힘을 분배 후 서서히 당기기.
중심.
일정한 위치.
흐트러지지 않기.
힘을 유지.
내가 흐트러지지 않았던 적 있었던가? 양궁을 하던 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또 무언가를 하게 되었을 때. 무슨 다짐이었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뱀에게 잡아먹힌 새 알처럼 머리가 자근자근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한빈은 이곳에 와서 자신이 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한 짓을 장호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소실 된 약 5페이지.)
다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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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들겼다. 목덜미를 쓸어내린 한빈은 헛숨을 삼키며 다리를 더욱 세게 끌어 안았다. 몸이 비 맞은 개처럼 떨렸다. 앞에 장호가 있다.
대검을 든 장호는 기다란 복도를 건넜다. 툭 툭 툭 툭.
“불청객씨 브이하세요 브이.”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다. 피가 낭자했다. 장호는 그의 너덜너덜한 손목을 흔들었다. 스마일, 하는 조악한 소리와 함께 화질 낮은 카메라가 남자를 담았다.
“화면빨이… 앵. 실물도….”
사진과 남자의 실물을 번갈아 본 장호가 혀를 찼다.
“나는 핸드폰 안 쓰는데… 우리집에도 누가 폰을 써서 보내주려고. 여기에 너 같은 사냥꾼이 있거든.”
그는 자그마한 폴더폰을 내려다 보다가 멈추었다.
“아! 근데 보낼 필요 없을 거 같다.”
툭, 검으로 다리를 치자 의자가 기우뚱 넘어졌다. 그 뒤로 다리를 접어 안은 성한빈이 있었다.
“왜 구경하고 있어? 아는 사람이야?”
고갤 숙이며 발등을 세워 앉은 장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몰라.”
“기억이 안 난다고? 저 조끼가?”
장호가 대검으로 쓰러진 남자의 옷을 들추었다. 야생동물보호협회. 한빈은 못 본 척 고갤 돌렸다. 흐음…. 짧게 한숨을 쉰 장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요새 집에 이런 게 있던데… 혹시 뭔 줄 알아?”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부적이었다. 보란 듯이 그걸 이마에 붙인 장호가 빙긋 웃었다. 영물의 기를 쇠하게 만드는 부적이었다. 고상하게 두 손에 끼우자 부적이 타들어갔다. 그 길로 입에 불을 삼켰다. 빨간 한문이 그의 혀 위에서 뒹굴다 젖어들었다. 손등으로 재가 묻은 입매를 닦는 모습은 새삼 태연하기까지 했다. 기세 좋게 웃는 꼴을 보니 기가 쇠하긴커녕 성했다.
“나 안 버린다며… 완전 속았어.”
불현듯 일어선 그가 복도 너머 달 아래에 섰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까 뒤집었다. 이내 유행가를 멋대로 개사하고 흥얼거렸다.
오백 년 전 만나 수백만 번 사랑한 내 연인
그대 닮은 사람 만났지만
아닌가봐요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낭만적인 헤매임
노래가 끝나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덜덜 떨리는 한빈의 손을 내려다 본 장호가 옅게 웃었다. 아름다운 불량품은 망가질 때도 깜찍하구나. 무언가를 오래 사랑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 그 말은 틀렸다. 무언가를 오래 사랑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그는 언제부터 성한빈을 알고 있었을까? 성한 몸을 억지로 돌 아래로 부딪치는 미친 짓을 했을 때? 그가 오길 기다리며 태연히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악귀들에게 위치를 알리며, 집안 곳곳에 영물의 기를 쇠하게 하는 부적을 붙일 때?
유인하는 게 취미인, 오백 살짜리 여우.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여전히 짐승의 버릇을 못 버린 장호. 그의 먹이가 되거나 연인이 되거나.
비틀린 동화의 결말은 두 갈래 길처럼 엇갈렸다.
건축학과 장 선배는 무너뜨리는 일에 타고난 남자였다. 무언가를 짓는 사람은 이따금 무너뜨리는 일에도 탁월했다. 그는 에타에 매일같이 도면통 멘 탈색머리로 통하며 개근했지만, 용기 내서 연락해도 ‘네’ ‘ㅋㅋㅋㅋ 감사해요 근데 제가 반말은 못 해요’ 따위의 예의상 답장으로 선을 그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무너진 인간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도대체가 여지를 안 주네. 초장에 학을 뗀 이들은 장하오를 건조하고 도도한 남자로 오해했지만, 사실 그는 보면 볼수록 간략히 규정 지을 수 없는 남자였다.
한날은 시험 날 아침 혼자 눈을 못 뜨고 나타나선 에이쁠을 받는 학생이었다. 다른 날은 여자 후배가 인사하면 담배 쥔 손을 뒤로 빼고 ‘안녕하세요오.’ 꾸벅이며 능청스레 존대하는 외국인이었다. 비록 전날 잔뜩 취한 채로 대뜸 전화를 걸어 폭탄 선언을 한 그녀에게 ‘우리가 몇 살 차이인데 어떻게 만나….’라며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내쉬고 단칼에 밀어냈지만. 때론 비를 잔뜩 맞고 과방에 뛰어 들어온 그녀가 서 있는 방향으로 히터를 돌려주는 선배였다. 그는 건조한 듯 다정하고 현실적인데 낭만적이었다.
얼어 죽어도 코트가 아니라 얼어 죽을까 패딩을 입는 그는 여타 학교 유명인사들과 다른 감이 있었다. 꾸밈 없어 담백한데 이상하게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음표로 남았고, 때때로 그 점을 즐겼다.
장하오. 그는 어렵다 못해 문제적인 남자였다.
[건축학과 설계실]
[X 타과생은 학생회 허락 없인 출입 금지 X]
동그란 문고리 위에 안내문이 붙었다. 건축학과가 통으로 쓰는 건물이라 강의실, 설계실들이 하나같이 큼직큼직했다. 설계실 곳곳엔 커다란 구조물이 공간 형태를 갖추고 서 있었다. 가을에 열리는 건축전에 사용될 파빌리온이었다.
“마법의 성 짓냐. 레고하우스야?”
그날도 건축학과의 문제적 남자는 고고히 니트 위로 검은 앞치마를 멨다. 학과장의 악담을 배경음악처럼 깔아놓고.
교수의 힐난에 쩔쩔매는 신입생들과 달리 장 선배는 차분했다. 피라미드를 가져와도 비난할 양반의 말에 구태여 괴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스케치업이 돌아가는 노트북을 무릎에 얹어놓고 쿠션 꺼진 쇼파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온 햇빛이 정수리 위에 부서졌다. 이맛살을 작게 구긴 그가 금색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 고정한 채 낮은 탁상 위로 팔을 뻗어 빨대 꽂힌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입술로 향하던 플라스틱 컵이 허공에 돌연 멈춰선 건 그때였다. 컵 안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뭐야?”
유리창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타당탕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여러 개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소란의 근원지는 멀지 않았다. 학교 후문과 통하는 골목이었다.
설계실 통유리창으로 날아온 건 다른 게 아니라 맥북이었다. 몸을 일으킨 장하오는 통유리창 앞 책상에 기대어 섰다.
“형이 이쁜 말만 하고 싶다 했지…….”
장 선배처럼 이마를 쓸어올리지만 여유가 전혀 보이지 않는 남자. 쇄골 밑에 특이한 타투를 한 남자. 절대 대낮에 싸움 같은 상스러운 짓을 할 리가 없는 남자. 사람들은 성선설의 성이 성한빈이라 연호했다. 붙임성 좋고 책임감 있는 한빈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라, 주위에선 한빈의 연애를 궁금해 했지만 철저히 베일에 쌓여 있었다. 성한빈이 한사코 자신의 연애사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 남자를 좋아하는 성적 지향.
두 번째. 뒤틀린 것들만 사랑하는 유별난 취향.
때문인데, 똥차 수집 본능은 선천적인 걸까?
포기를 모르고 구제하려는 성정 때문에 성한빈의 속은 곪을대로 곪아있었다. 사랑에 특출난 재능은 없지만 근성으로 밀고 가는 타입. 밀당을 글로 배웠는지 나름 밀어보고 ‘이거 맞나아...?’하고 무장해제 되리만치 샐쭉 웃는 얼굴. 연애에 있어 기교 없이 지구력으로 승부하는 타입.
똥차 수집은 천성과 관련된 일인지 몰랐다.
만나는 놈들마다 '한빈아 이번 달 휴대폰비 좀 내주면 안 될까' '내가 코인 줄을 잘못 타서 지금 마이너스 통장인데 혹시 너 지금 통장에 얼마 있니'라며 주님도 인류애 상실하고 내가 니들 봉이냐 십새끼들아 외칠 낭설을 늘어놨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치는 동안 넓은 아량으로 품었다. 돈이 중요하지 사람이 중요한가. 난 손해에 연연 안 해. 얘도 형편 때문에 그렇지 알고 보면 착한 애고… 등등 지난한 레퍼토리로 유지됐던 빌어먹을 구제 본능.
벌써 이 년째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지.
“어떻게 한 달 동안 연락 한 번 안 해? 형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야? 씨발 그냥 다시 만나자고 쫌… 어? 새로 시작하자고 우리. 응? 안 그럼 나 여기서 형 이름 부르고 소리 지른다?”
성한빈의 품에 들렸던 맥북을 빼앗아 던진 장본인이 아스팔트 위에 대짜로 누웠다. 하지만 성한빈은 역시 성成 마리아답게 시냇물처럼 잔잔한 얼굴이었다. 외려 웃는 입으로 복화술을 했다.
“즈은 믈르 흘 뜨 그르(좋은 말로 할 때 가라.). 느그 그르즈믄 은으쓰드 느 즈금 으 즛그르 은 흐쓰느끄.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 지금 이 짓거리 안 했으니까).”
그렇다고 잘한다는 소린 아니었다. 잇새로 노란 테이프를 뜯은 한빈이 전봇대에 주먹을 세우고 눌렀다. 전봇대 허리 부근이 쿵쿵 울렸다.
"형 캄다운 해. 그땐 내가 심신미약이었잖아."
"니 심신이 창대한 날이 언제는 있었어?"
“형 말이 심하네? 형 내가 사 준 독도로션 안 발랐어?”
“……발랐어. 니가 예비군 피엑스에서 사온 칠천 원짜리 독도로션.”
“형 그렇게 나한테 기생하면서 이런 거 한 번 못 봐줘?”
“기생?”
이마를 향해 훅 입바람을 분 한빈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게 지금 나 몰래 내 명의로 칠백 쓴 놈이 할 말이야?”
고소 안 당한 걸 감사한 줄 모르고. 한빈이 이골이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둘 사이 마가 뜨던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바람이 불었고 전단지가 펄럭였다.
[신촌 희망하숙 하숙생 구합니다.]
하숙. 하숙이 뭐지. 미간을 모은 장하오는 입안에 단어를 굴려보았다. 어느새 그는 3층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대고 그들을 관전하고 있었다.
“쟤 성한빈 아냐?”
짧은 허쉬컷 머리를 아래로 바짝 묶은 여진이 담배 필터를 질겅 씹었다. 하오가 작게 혀를 차자 그녀가 두 손을 착 모으며 말한다.
“여기서 안 핍니다 오라버니. 걱정마세요.”
“그거 말고.”
“뭐가?”
하오가 아래로 턱짓했다. 여진의 시선이 따라갔다.
“문창과 앤데 학생회 같이 했었어. 룸메 구한다던데.”
아아. 작게 끄덕인 하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신기했다. 무언가를 짓는 사람이 저렇게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게. 글이든 집이든 무언가를 짓는 사람들은 늘 통달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니 그런 척이라도 한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무너져 있는 쟤는, 뭐지?
그 사이 둘의 갈등은 급경사를 탔고 기어이 칠백이 한빈의 멱살까지 잡았다. 성한빈은 자신보다 한 뼘 큰 그를 마뜩잖게 올려다 보았다. 이내 성한빈이 그의 팔목을 붙잡고 힘껏 밀어내던 순간, 불쑥 칠백 만원 이마 아래로 갈색 국물이 쏟아졌다. 원두 탄내가 진동했다. 일시에 둘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어우 대박. 그러게 왜 거기 있지.”
난간에 기댄 장하오가 고개를 느물대며 능청스레 웃었다. 칠백이 젖은 옷을 털며 얻어 맞은 고라니처럼 소릴 질렀다. 불현듯 성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장하오가 입모양으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무심결에 그의 입모양을 따라 해보았다. 첫 문장은 곧잘 따라했지만 뒤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쟤 너무 나빠.
얘 너무 나빠?
(그래서 내가 벌 줬어.)
난데없이 끼어든 그는 드라마 시청자처럼 칠백을 품평했다. 그가 갈색 액체가 비워진 플라스틱 컵 위로 텅 소리나게 뚜껑을 닫았다. 저게 실수일 리가 없었다. 하늘에서 솟아나 성한빈 대신 벌을 준 남자. 아무도 모르던 성한빈의 무너진 얼굴을 최초로 발견한 남자. 주제 넘는다고 해야 할까 정의롭다고 해야 할까. 비싼 옷이라며 물어내라 일갈하는 칠백에게 장하오가 왜 나한테 기생해, 라며 빙글거렸다.
그 어떤 단어에도 견주기 어려운 사람. 그게 장하오였고, 이 순간은 둘의 첫 장면이었다.
-
건축학과 장 선배는 신촌 희망하숙의 마지막 하숙생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하숙집이 있냐. 선배가 왜 거길 들어가? 원룸 투룸, 것도 아니면 투베이까지 대학생 살만한 곳은 세고 센데. 왜 거길에서 '거기'를 맡고 있는 희망하숙의 주인 성한빈은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이 집에 하숙생을 받았다. 칠백을 메꾸기 위해.
전단지를 붙인지 불과 하루. 이렇게 빨리 하숙생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들어올지 몰랐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낡은 기와 쌓아올린 하숙집에, 건축학과 학생이?
마당을 가로지르며 다가온 장하오가 덜 마른 시멘트를 밟은 건 이른 아침이었다. 무안한 얼굴을 한 선배는 어… 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안녀엉.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제 그 사람 맞나? 일단 한빈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장하오의 체크무늬 셔츠 밑단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그의 윗머리가 누가 쓸어넘긴 듯 훅 까 뒤집혔다. 조금 낮은 말투가 바보 같아서 한빈은 속으로 웃었다. 혹시 어디 나사 빠진 인간은 아니겠지. 문자로는 괜찮았는데. 이미 서로 호구조사를 마쳤지만 다시금 찬찬히 그를 뜯어보았다.
어깨 아래 달랑대는 나이키 가방. 밑창 새까만 아이보리색 컨버스. 그가 남긴 발자국 하나.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마루에 앉았다. 한빈은 부서진 맥북 대신 당근에서 급 장만한 두꺼운 랩탑을 덮었다. 랩탑이 괴이하게 웅웅거렸다. 장하오가 신발 밑창을 마루 아래 댓돌에 직직 그었다. 돌 위로 시멘트가 묻어났다.
“동류야.”
“동류?”
머리가 바시락거릴 정도로 장하오가 세차게 고갤 흔들었다. 초장부터 반말이라 당황했지만 외국인인 점, 한 살 많은 점을 감안 해 성한빈은 넘기기로 한다. 이내 자신도 반말을 뱉었다.
“건축이랑 글의 공통점이 있어.”
“뭔데?”
“건축할 때도 시나리오를 써.”
“…시나리오?”
“머릿속에 배경을 펼치고 거기서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이 느낄 감정들을 상상해. 영화 세트 만드는 것처럼. 우린 세트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이야.”
“아.”
“그러니까 우린 동류야. 사람을 상상하고 무언가를 짓잖아.”
언뜻 수긍이 되었다. 한빈이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오가 힘을 풀듯 웃는다. 볼에 세로 보조개가 있다.
“집 잘 지었다.”
“우리 집?”
불현듯 두리번댔다. 엄마가 나고 자랐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곳이지만 한빈이 보기에 잘 지은 집은 아니었다. 오래된 집이지.
“내가 행복할 거 같아. 여기서.”
“…….”
“그리고 너 머리도.”
“…으에?”
“까치가 집 지었어.”
“…아.”
“까치가 행복할 거 같아.”
한빈이 머리칼 틈새로 손가락을 넣고 잡아 눌렀다. 거울을 보고 싶었다. 아침이라 홍조가 올라오고 머리가 뻗쳐 있을 텐데. 내 방 저기? 장하오가 크리스마스 리스가 달린 방을 턱짓했다. 한빈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는 웃으며 마루를 지나 방으로 향했다. 나무문이 끽 닫혔다. 닫힌 문을 응시하던 한빈은 그가 남긴 발자국을 내려다 보았다.
처음 온 남자가 남긴 발자국.
그의 첫 번째 흔적.
성한빈은 발자국을 볼 때마다 그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
성한빈은 그를 장길동이라 부를까 고민했다. 왜냐하면 성한빈이 있는 곳마다 두문불출 나타났으니까. 성한빈이 알바하는 복권방, 학교 흡연구역, 교양 강의실이 있는 건물. 이상하리만치 동선이 겹쳤다.
흡연구역에서 만난 그는 니트를 입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니트 위로 벚꽃 한 잎이 떨어졌다. 그는 여학생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성한빈은 어렵잖게 알아챘다. 니트에 내려앉은 벚꽃잎을 쳐다보는 시선이 여러 개라는 걸.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 중에 성한빈을 지나치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던 짧은 찰나 그가 담배를 비벼끄고 걸어 온다.
걸어 온다.
어디를?
성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돌렸다. 그가 어디서 멈출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오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상념에 빠지던 그 순간이었다. 장하오가 뒤에서 머릴 쓰다듬으며 어깨 위로 턱을 얹었다.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성한빈이 불편한 듯 가방을 고쳐맸다. 장하오는 이따금 성한빈의 등에 무언가를 써내렸다. 숫자인가. 글씨라기엔 획수가 적었다. 가만 기척을 느낀 한빈이 숫자를 곱씹었다.
54335?
그게 뭐야?
맞춰봐.
아 뭔데.
난 니가 궁금해하는 게 좋아.
진짜 이상하네… 왜?
너한테 수수께끼로 남고 싶거든.
이상한 사람이네…… 영화대사야 뭐야. 복권방에 출근해 한빈은 네이버에 그 숫자를 검색해보고 잠시간 멍하게 있었다.
54335
중국어 암호입니다.
'별 일 없으면 날 생각해'
라는 뜻이지요.
뭐지?
이제껏 숫자의 의미를 의문하며 그를 생각했는데 재차 생각이 끊이질 않게 만든다. 진짜 뭐지? 볼썽사나운 웃음이 터졌다. 손님이 왔는지도 모르고 휴대폰을 몇 분이나 쳐다봤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온 뒤론 방안에 누워 카톡을 확인하다가 불현듯 마루로 나갔다. 성한빈은 말을 잘 들었으므로 저녁 내내 장하오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마당에 남은 그의 발자국. 슬리퍼를 신고 걸어가 그 위에 발을 맞대보았다.
사이즈가 똑같았다.
이것도 동류라면 동류였다.
누군가의 발모양을 상상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순간 녹슨 대문이 끽 열렸다. 한빈은 화들짝 놀라며 마루로 뛰어갔다. 널브러져 있던 신문을 들고 얼굴에 덮다시피 펼쳤다. 입가에 웃음기를 매단 하오가 신문을 검지로 퉁겼다.
“거꾸로 드셨어.”
종이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이 유리창 두들기듯 울렸다. 여전히 못 알아먹은 한빈이 무심코 신문 앞면을 돌려보았다. 국무총리가 온화한 얼굴로 물구나무 서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새 그는 가고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모래 알갱이만 굴러다녔다. 그제야 한빈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그에겐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분명 갔지만 여전히 앞에 있는 기분을 안겨주는 것. 발자국 때문인가. 아 뭐래....... 한숨을 뱉은 한빈이 후드를 뒤집어쓰며 방안에 몸을 넣었다.
-
발자국에 물이 고인 날이었다. 기와 아래로 빗물이 떨어졌다.
“그 나쁜 애는 어떻게 했어?”
“……칠백이? 그냥 뒀어.”
“돈 아까워. 성한빈 돈. 그러면 안 돼.”
“그래서 매일 복권 사잖아. 대박 나려고.”
실수로 빨래에 같이 돌려버렸던 복권 용지가 마루 위를 뒹굴었다. 드러누운 한빈이 시집을 펼쳤다. 그 순간 귀가 막혔다. 줄 이어폰 한짝이었다. 한빈이 내려다보자 물 빠진 머리칼이 어깨에 닿았다. 따라 누운 장하오가 어깰 기대왔다. 그는 모서리가 벗겨진 구형 아이팟을 천장을 향해 들었다. 이렇게 보니 그가 이 낡은 하숙집에 들어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지나간 것들을 사랑했다. 아직도 줄이어폰을 꽂고 아이팟을 켜는 사람이었다.
“외국인이 이런 노래를 알아? 거리에서 이거 진짜 오래된 노랜데.”
“내 18번이야.”
한빈이 그에게 몇 살이시냐고 놀렸다. 그는 옛날 노래엔 마음이 있어, 라고 진지하게 웅얼거렸다. 둘은 별도 없는 서울 밤하늘 아래에서 남의 마음을 들었다. 마루가 비좁아 그런지 손가락끼리 자꾸 부딪쳤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연신 헛기침을 뱉던 한빈이 시집을 배 위에 얹으며 물었다.
사람 손가락이 열 개인 이유가 뭔줄 알아?
장하오가 말없이 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엄마가 열달 품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한 태아의 노력이래.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선한 거라고. 시집에서 봤어.
난 사람들이 선하다고 믿어. 세상이 험해서 자길 오해하고 살아갈 뿐이지.
낙담한 순간도 많았는데 그냥 믿고 있어 성선설을. 아무도 나쁘지 않길 바라면서. 세상을 무한하게 긍정해줄 사람은 꼭 필요한 것 같아. 나쁜 사람이 많을수록.
장하오가 불쑥 몸을 들어올렸다. 한빈이 연거푸 눈을 깜박였다. 아빠다리를 한 그와 한빈의 사이로 이어폰 줄이 죽 늘어났다.
나도 오늘부터 믿을래.
뭘?
성선설.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가 한빈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웃음에도 무게가 있을까. 장하오의 웃음은 너무 무거워서 성한빈의 심장을 내리눌렀다. 심장이 낮은 곳에서 빠르게 울렸다. 마른 침을 삼켰다.
타인의 마음에 내가 얼만큼의 공간을 차지하는지 헤아리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성한빈은 끝내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눈짓, 표정은 어떤 마음일 때 나오는 건지, 지금 들고 있는 휴대폰으론 누구와 연락하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들이 불현듯 궁금해져 가슴이 답답했다.
아. 망했다.
두 눈을 꼭 감으며 입안의 살을 씹었다. 무언가를 궁금해 할 때부터 고통은 시작 되는 법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팔을 쓸고 지나갔다. 뒤에서 나뭇잎이 으스스 웅성거렸다. 그날 비는 그치지 않았다. 젖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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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아무도 찾지 않는 하숙집에 발을 들인 특이한 남자였다. 그가 더 좋은 곳에서 외박을 하든 뭘 하든 그런 건 성한빈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밤 늦은 시간 누군가와 통화하고 조용히 옷을 챙겨 밖을 나서도. 전혀.
성한빈은 마당 대문 앞까지 나섰다 발길을 돌렸다. 슬리퍼 밑창이 발바닥에 쩍쩍 늘러 붙었다. 제 발끝만 쳐다보며 츄리닝 바지에 손을 넣었다. 방벽에 납작하게 등을 기댔다. 연거푸 혀 위로 욕을 굴렸다. 버릇처럼 기다란 숨이 튀어나왔다.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한심했던 적이 없었다. 괜스레 한기가 느껴져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겼다.
추워.
몇 시지.
강의까진 한 시간 남짓 남았을 테다. 해는커녕 어둠이 깔린 방안엔 적막이 덩어리째 내려앉고 있었다. 어둠도 빤히 바라보던 눈이 먼다고 했던가. 성한빈은 눈을 감았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한숨의 원인은 약 올리듯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 좀 자자. 제발. 사라져라 밀어내듯 미간 사이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하지만 그놈의 잘난 상판은 떠날 생각도 안 한다. 되려 선명해지면 모를까.
“짜증나네 진짜.”
잇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는 건 근심을 없애고 싶어서가 아니라 근심이 좀 나타났으면 해서였다.
눈앞에 없으니까 이렇게 멋대로 그려지잖아. 어디서 누구랑 있는지, 어떤 말투로 말을 뱉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빛은 어떤지. 씻고 나올 때마다 수건 아래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와, 츄리닝 반바지로 살짝 보이는 두꺼운 허벅지가 이렇게 눈앞을 스쳐가면…….
뭔 생각을 하는지.
뇌가 썩었나.
진짜 미친놈.
성한빈은 힘을 실어 자신의 두 뺨을 연신 내려쳤다. 양볼에 벌건 자국이 올라왔다.
상념에 잠긴 사이 마당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 뒤축을 끌며 걷는 걸음은 급한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장하오다. 이윽고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성한빈은 이끌리듯 종잇장처럼 얇은 방벽에 귓바퀴를 가져다 댔다. 장하오가 제 방문을 잠시 열었다 닫더니 성한빈의 방문을 두드린다. 성한빈은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빈, 자?”
나 들어가도 돼?
안 된다고 해도 들어올 거면서. 곧 문이 활짝 열렸고 이불이 펄럭였다. 틈새로 장하오가 몸을 누인다.
“새벽이라 너무 추워어…. 나 자는데 완전 깼어.”
거짓말을 뱉은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다. 큰 손이 이불을 비집고 들어온다. 뒤에서 장하오가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너 따뜻해.”
팔과 배를 주무르며 말한다.
“좋다아.”
장하오는 종종 외박했다. 성한빈은 그런 장하오를 아침마다 기다린다. 그때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다 일어난 척을 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 무거워.”
“거짓말.”
그건 형이나 하는 거겠지. 성한빈은 그를 욕하면서도 겉으론 웃었다. 어느새 해가 방안으로 넘어왔다. 바닥 장판 위로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빛이 쏟아졌다. 햇빛에 괴로운 척 인상을 쓰자 장하오가 몸을 더 가까이 붙여왔다. 눈을 감아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내 그는 귓불에 입술을 대고 뇌까렸다.
“학교 가자. 졸업해야지.”
성한빈은 대답 없이 숨을 죽였다. 졸업하면 장하오는 여길 나가겠지. 당연한 걸 혼자 묻는다. 건축학과 5학년 장하오는 졸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막학기를 보내는 성한빈 역시 졸작을 쓰고 있었다. 속 편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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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개념은 개나 줬는지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와서는 낯 간지러운 짓을 서슴없이 했다. 이를테면 흉곽이 꽉 조일만큼 뒤에서 끌어안기, 목덜미에 얼굴 파묻고 춥다 찡찡거리기. 미친놈 6월인데. 그럴 때마다 성한빈은 털털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에서 곤욕을 치뤘다. 성선설의 성이 성한빈인 건 아무래도 비약이었다. 좀, 아니 좀 많이 생긴 놈이 끌어안는다고 밑에부터 세우고 보는 놈은 빈말로도 선하다 할 수 없으니까. 근래 들어 성한빈은 자주 고장난 사람처럼 굴었다. 일상이 계획투성인데 장하오 앞에선 뼈도 못 추렸다. 장하오 앞에선 생각도 계획도 통하지 않았다.
장하오는 사랑을 한낱 유희로 생각하는 것 같다가도 이야기가 나오면 한없이 진지해졌다. 감정 없는 사람처럼 서늘하게 차분하다가도 어느 부분에선 아이처럼 시끄럽고 사랑스러워졌다. 매사 모든 수를 꿰고 있는 능구렁이처럼 굴다가도 외국인이라 모른다며 도움을 구할 땐 새끼강아지처럼 어리숙했다.
궁금하지 않고 베길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그만하자, 그만하자 생각해도 ‘별 일 없으면 내 생각해’ 라는 뜬금 없던 암호가 떠올라서 골몰했다. 그는 왜 자기 생각을 하라는 걸까.
일상에 그가 가득하게 들어차니 어떤 장면에든 넣고 싶었다.
문득 노트북을 열었다. 어슴푸레 뜬 화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백 스페이스를 누르다가 타이핑을 시작했다.
[과제 양식]
한 장면(200자 원고지 7매 내외)
1. 첫장면 쓰기 (80매 분량의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들어갈 첫장면을 쓰시오.)
첫장면은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온 건축학과 남자가 덜 마른 시멘트를 밟는다.
2. 줄거리 하나를 구상하고, 그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선택하여 1인칭 시점 서술 (서술자의 성격, 사연 등이 드러나도록 서술할 것)
건축학과 그 남자가 주인공이라면 그 남자에게 하숙집 사는 성한빈은 중요한 사람일까? 아니, 그냥 동거인 정도? 아마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겠지.
성한빈이라는 주변인을 서술자로 정한다. 둔할 정도로 사랑에 무지하고 자기 좋다는 쓰레기들에게 구제 본능을 앞세운 이상한 연애만 해오던 남자를.
싸늘한 봄날 아침 둘은 만났다. 신촌 후미진 골목 구석어귀 희망하숙에서.
그리고.
쓰다 보니 이건 그냥 장하오 얘기였다. 빼곡히 적어내린 문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지우다 보니 방금 전까지 분명 활자가 빼곡히 차 있었는데 순식간에 한글 창이 텅 비어버렸다. 장하오 하나를 빼버리니 너무 허전했다.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져 거실에 나가 냉수를 들이켰다.
장하오 방의 불은 켜지지 않는다. 내년 초에 있을 졸업작품전을 준비하느라 집에 들어올 새도 없이 바쁜 듯했다.
기다릴까.
냉수를 삼키다 말고 내뱉었다. 사레 들린 얼굴이 새빨갰다.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격한 기침이 튀어나왔다. 와중에 아랫입술을 꾹꾹 씹으며 되뇌였다.
기다리자.
버티는 건 타고났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 장면엔,
그렇게 말하지만 실은 무너진 얼굴이었다고
묘사 한 문장이 더 붙어야 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생략되었다. 사랑에 빠진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
“비 오려나.”
알바가 끝나고 복권방을 나섰다. 영원히 당첨되지 않을 복권 용지를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학교 앞과 버스 정류장 사이에 짧은 횡단보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 솟아오른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성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장하오였고 옆엔 여자가 있었다. 우산이라기보다 차라리 양산에 가까운 조악한 우산을 장하오에게 씌워 준 채로. 그녀보다 두 뺨이나 큰 그는 허릴 숙이고 그녀와 무어라 대화했다.
한빈은 짐짓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들의 대화를 실수로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그가 이런 모습인데 자신이 없을 땐 어떨지 상상하게 될 것 같아서. 거기에 둘은 어쩌다 함께 나왔는지부터 서롤 어떻게 보고 있는지까지, 생각이 많아질 게 뻔했다. 멀리서 젖은 승용차들이 차르르 물길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여자에게 꾸벅 인사한 장하오가 성큼 걸어온다. 십이 초, 십 초, 팔 초… 초록색 신호등이 깜박거린다. 성한빈은 그의 발끝을 쳐다보았다.
시멘트 묻은 컨버스.
벌써 초여름이 되었지만 마치 처음 본 날 같은 그의 모습.
그리고 영원히 모를 그의 마음과 생각과 표정의 의미들. 성한빈은 불현듯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마른 기침을 했다. 메마른 뺨에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버스 정류장 지붕에 물이 고였다. 변덕스런 초여름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눈앞에서 빗줄기가 거세지는데 어째 머리칼을 적시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심코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큼직하고 하얀 손이 제 머리 위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장하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비 와. 한빈아.”
동시에 낮지만 나긋한 목소리가 비와 함께 쏟아졌다.
“…뭐해.”
“손우산.”
“손우산?”
“너 비 다 맞아.”
지척에서 풀 비린내가 훅 끼쳤다. 성한빈은 침을 삼켰다. 말을 뱉으려다가 목이 막혀버렸다. 목넘김이 껄끄러웠다. 살다살다 손우산이란 건 처음 들어 봤다. 이게 우산이라고? 대답도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그러자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성한빈을 내려다 보았다.
뭐 이런 짓을 하느냐고…. 성한빈은 말 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처음엔 갑작스레 제 머리 위에 올라온 하얀 손 때문에. 그 뒤엔 입술에 머무는 시선 때문에.
말 할 때 시선을 입술에 두는 건 습관일까 의도일까.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을 당황시킨다. 종 잡을 수 없는 성격은 다분히 천성인 듯했다. 미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이런 짓은 뭐, 여자한테나 하는 거 아닌가? 이걸 남들이 본다면 뭐라 생각하겠어.
그때 누군가 멀리서 소리쳤다.
“성한빈! 버스 잡아!”
“어? 어.”
우산을 쓴 사람은 간만에 밥약을 잡은 졸업학번 동기 창진이었다. 성한빈은 까무룩 잊고 있던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정류장에 번화가 가는 버스가 와 있었다. 눈을 들어 장하오를 보자 시선이 맞물렸다.
“갈게.”
이윽고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흔들리는 차체에서 중심을 잡고 걷던 성한빈은 뒷자리에 앉자마자 창을 열었다. 머뭇대는 시간은 짧았다. 여전히 이곳을 보고 있는 장하오를 향해 외쳤다.
“집에서 봐!”
버스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눈앞에서 장하오가 빨리 감기 한 영상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가는 내내 열린 창밖을 멀거니 응시했다. 비를 맞고 출렁이는 강, 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강아지, 산책하던 커플. 그들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내달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자가 여자 머리 위에 손우산 같은 걸 해주지 않았다. 그들에겐 성한빈이 느낀 무언가가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리칼을 부서뜨리는 바람이 미지근했다. 차멀미 해 본 적 없는데 속이 자꾸 울렁거렸다. 옆에선 창진이 따발따발 떠들었지만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한빈은 내릴 때까지 반쯤 누워 있었다. 팔을 툭툭 건드려도 모를 정도였다.
정신 없이 쏟아지듯 내리면서 혼자 손우산을 해보았다.
장하오와 함께 있을 때, 그때의 숨 막히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
매미가 밤낮으로 시끄럽게 중얼거렸다. 해가 느지막이 지는 여름의 중턱이었다. 더위가 짙어질수록 불면도 깊어졌다.
얇은 반팔을 입은 한빈이 거리 귀퉁이로 나왔다. 잰걸음으로 슈퍼에 들어섰다. 통밀식빵과 제로콜라를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 파리를 쫓던 아줌마가 하품을 하며 담배 한 갑을 툭 내밀었다.
봉투를 들고 나와 송전탑 앞에 츄리닝 바짓단이 땅에 닿을 정도로 쭈그려 앉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동네를 무연히 응시했다. 주차 금지 고깔, 평상 위 말린 고추, 옥상 지붕에 뒤집힌 고무 대야. 일상의 장면 속, 장하오 빼고 모든 게 있었다.
콧등에 내려앉은 안경을 추어올리지도 않은 채 필터를 빨아들였다. 목울대가 제멋대로 울컥거렸다. 이내 매운 숨을 뱉었다.
미련한 기침이 멈출 즈음 골목 너머에서 기척이 들렸다. 한빈이 발바닥에 힘을 실으며 일어섰다. 이내 발이 묶여 섰다. 골목 끄트머리에 한빈의 고개가 슬쩍 솟아올랐다. 발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엔.
어둑한 가로등 아래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짧은 허쉬컷 여자의 뒷모습은 어쩐지 낯이 익었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점차 숨을 고르게 쉬기가 어려웠다. 불안한 듯 입술을 씹은 한빈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캄캄한 가로등 아래서도 저 하얀 얼굴은, 정말 모를 수가 없었다.
둘은 서로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장하오가 골목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지만 성한빈이 문 뒤에 숨는 게 더 빨랐다. 녹슨 파란 대문이 끼긱 비명을 질렀다. 한빈의 그림자가 마당 담장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마루 기둥에 걸린 낡은 시계가 아침 일곱 시를 가리켰다.
마당으로 들어온 장하오가 경쾌하게 혀를 굴렸다. 한빈은 문틈 사이로 허름하게 숨어 그를 보았다. 그가 청바지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던 그 순간, 휴대폰과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희미하게 빛을 뿜는 가로등이 두어 번 깜박였다. 한빈이 마른 침을 삼키며 실눈을 떴다. 성인이 저걸 모르면 병신이었다. 작은 정사각형 상자. 저건, 육안으로 봤을 때 완벽하게 콘돔이었다. 유유히 콘돔을 주운 그가 마루를 지나 거실문을 열었다. 전깃줄에 앉아있던 새떼가 무리 지어 날아갔다.
성한빈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금방이라도 헛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이 있던 건가. 아니 대체 만나는 여자가 누구인 건가. 우산 씌워 준 여자? 골목에 같이 있던 여자? 한 명이 아닌 건가.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들이 충돌했다. 대가리에서 빅뱅이 일어났다. 장하오로 세계를 만들 만큼 머리가 복잡했다. 관자놀이가 무겁게 울렸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칫솔을 물고 뚜껑 덮은 변기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하오가 문을 두드리고서야 한빈은 움찔 어깨를 털었다. 주방 식탁에서 장하오가 토스트에 잼을 바르고 있다. 한빈은 미적미적 걸어가 마트에서 받아온 포도알 스티커를 냉장고에 붙였다. 싱크대 위로 난 유리창 너머로 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었다.
한빈이 사고 친 건 그때였다.
“형.”
“으응.”
“남자랑도 해 봤어?”
밥 먹었냐는 말처럼 일상적인 투에 하오는 잘못 들었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식빵을 문 채 되물었다.
“므라그?”
“그냥 나는 한 번도 못 해봤으니까……. 궁금해서.”
“그런 걸 왜 묻지?”
마뜩잖은 얼굴로 베어 문 식빵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싫은 소리였나. 한빈은 지금 딱 미친 사람처럼 굴었는데 자신만 몰랐다. 투명한 식빵 봉지 끄트머리를 만지작대던 한빈이 불현듯 눈을 들었다.
“나랑도 해보면 안 돼?”
“그러니까 뭘?”
“모른 척 하지 말고.”
“성한빈 뭐 잘못 먹었어?”
이거 상한 거야? 장하오가 성한빈 앞에 있던 식빵 봉지를 들어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3일 남았다. 그러니까 이 미친 소리는 창의적으로 나온 소리였다.
“아니 진심이야. 왜. 난 안 돼?”
황당하단 시선이 다시금 한빈을 향했다. 눈썹을 늘어뜨린 한빈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 아까 형 봤거든? 콘돔.”
너무 몰라서 그러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쓸며 안경을 벗은 장하오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 왜 웃어. 나 진지해.”
“미안 미안. 안 웃을게.”
“짜증나.”
“진짜 하고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 진짜 해줄 것 같은 물음이었다. 구겨진 반팔 티셔츠. 발그레 올라온 홍조. 동그란 뒷통수 옆으로 비죽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빈은 그런 행색으로 그를 쳐다만 봤다.
“그럼 애교 해 봐. 해주세요 하고.”
“미쳤냐?”
또 능글거리는 태도에 한빈이 질렸다는 듯 식탁에서 일어섰다. 빙글 웃던 장하오가 다시 의자 위로 성한빈을 몰아 붙이더니 그 밑에 발등을 세워 앉았다. 이내 성한빈의 두 무릎을 손으로 잡아 살짝 벌렸다. 안 그래도 하얀 허벅지 밑이 창백하게 짓무를 때까지 뼈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쥐어 점차 들어올렸다. 널널한 반바지통 안으로 허벅지부터 드로즈까지 다 드러낸 꼴이었다. 기우뚱 중심을 잃은 한빈이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장하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뒤로 기울던 의자가 탁 소릴 내며 돌아왔다.
“아 뭐하냐고 진짜….”
“내가 너랑 못 할 것 같아?”
“……으윽.”
장하오가 멈추지 않고 한빈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귓구멍에 바람이 훅 끼쳤다. 순간 한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헛웃음 치는 소리가 이마 위로 떨어졌다.
“쫄면서 무슨.”
“…….”
아무한테나 해달라고 하지 마. 한빈이 실눈을 뜨자 하오가 헝클어진 반팔을 매만져 주었다. 멋쩍게 목덜미를 쓴 한빈이 그의 돌아선 등을 보며 입을 비죽거렸다.
“나도 형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방법 좀 알려줘.”
“말을 막 하네.”
“형이 그렇게 보이니까,”
“니가 나에 대해 알아?”
성한빈은 이 순간 그가 외국인이라 말을 잘못한 건 아닐까,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그런 핑계거리를 찾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형을.”
“모르면 좀 알아봐. 나에 대해서.”
하오가 싱겁다는 듯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빈이 짜증스레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잼이 묻은 입가를 닦았다. 이내 휴지통을 열자 불현듯 눈이 커졌다. 마포구 보건소 스티커가 붙은 콘돔 상자가 있었다. 잘못 본 듯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짜증나. 받은 거였으면 받았다고 말을 하던가.
변명 하나 안 하는 형이 미우면서도 이렇게 볼품없는 자신이 싫었다. 마음은 처절한데 장하오는 대수롭지 않아서 좀 비참해졌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한빈은 식빵을 포크로 조각내는 데 혈안이었다.
거실에선 찬바람이 훅 끼쳤다. 조용히 나간 모양이었다. 멍하니 벽에 걸린 농협 달력을 보던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 어제까지 기억하고 선물을 사두었는데 콘돔 때문에 찰나 까먹어 버렸다. 오늘은 장하오가 태어난 날이었다. 서둘러 카톡창을 열었다. 요란 피운 게 미안해졌다. 긴 문장으로 축하메시지를 써 보고 기프티콘 목록을 훑다가 멈추었다. 선물은 사실 성한빈 책상 위에 있었다. 8세대 아이팟. 이걸 주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비까지 걸어놓고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결국 장하오 때문에 굳이 깔아두었던 위챗에 들어갔다. 마지막 메시지는 '애들이 종강 했다구 술 마시자 해서 늦게 들어갈 것 같아'였다. 성한빈이 보낸. 답장이 없어 홀수로 남은 말풍선.
진짜 이런 날까지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형 해피버스데이 :) 아까는 내가 좀 미쳤었나봐 미안해]
[좋은 하루 보내]
한 문장 덜컥 보내고 홀드키를 눌러버렸다.
좋은 하루는 개뿔. 지금 솔직한 심정으로는…
형 좋아해
근데 포기할게
이게 내 선물이야
이 문장들을 보내고 싶었다.
-
여름이 가는 걸 짧아지는 해를 보고 알았다. 초가을엔 장하오가 집에 없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성한빈은 꾸준히 포기를 도전 중이었다. 마당에 들어오면 절대 시멘트 위 발자국을 쳐다보지 않았으며 그의 방에 불이 켜졌는지 둘러보지 않았다. 거실 식탁에 앉아 당첨 안 된 복권 용지에 네임펜으로 꽝만 적어 내려갔다. 발소리도 듣지 않으려 방에선 이어폰을 끼고 잤다.
한날은 장하오가 불러세웠다.
“한빈아.”
마루를 지나던 한빈이 일순 멈춰 섰다. 무슨 오기였는지, 대뜸 자존심을 세웠다.
“형. 나 요즘 진짜 바빠서 얘기 길게 못 해.”
“바빠?”
“응. 형도 바쁘겠지만 나도 원고 100매짜리 졸작 쓰느라 바쁘거든. 그리고 나 애인 생겼어.”
어깨 위로 수건을 두른 장하오가 목을 두둑 소리나게 꺾으며 물었다.
“바쁘다며 무슨 애인이야.”
“그것 때문에 더 바쁜 것도 있어. 학교 밖에서 기다려서 나 좀 만나고 와야 될 것 같아. 오늘 아예 못 들어올 수도 있구.”
스스로 생각해도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자꾸만 입안이 말라 입을 합 다물었다. 팔목에 걸린 채 미끄러지는 후드집업을 끌어올렸다.
“…누군데?”
하지만 장하오는 믿는 기색이었다. 믿기 위해 별다른 노력도 없이 쉽게 믿어버렸다. 볼 안으로 혀를 굴린 한빈이 고개를 숙이며 허탈한 듯 웃었다.
“형은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한빈이 후드집업 자크를 조물락 매만졌다. 장하오가 목덜미를 쓸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가 하, 하고 한숨을 쉬자 목울대가 불거졌다. 기분이 나쁜 건지 피곤한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빈이 슬쩍 그를 곁눈질했다. 장하오가 성한빈에 대해 모르는 게 생긴 건 처음이었다. 아마 이대로면 둘은 서로에 대해 영영 모른 채로 살아갈지 모르겠다고, 성한빈은 생각했다.
그를 두고 한빈은 신발을 엉망으로 꺾어 신다시피 하고 뛰쳐나왔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이내 벗겨진 신발은 볼품없이 흙탕물을 맞고 젖어버렸다. 젖은 신발 한 짝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권가게 앞이었다. 맞은편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주병을 사 들고 나오자 그때 실감이 났다. 내 뒤통수가 얼마나 병신 같았을지.
정말 얼마나 병신 같았으면 또 병신이 꼬였다.
“형! 너 카드 왜 정지했냐.”
편의점 안에서 나오던 칠백이었다. 그가 바깥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빈의 뒤통수를 단번에 알아봤다.
“넌 또 뭐야....”
“이런 격한 인사 좋은데? 난 형이 착한 얼굴로 욕 해줄 때 흥분되더라 흐흐. 그때 우리 잘 해결하기로 하고 형이 연락 없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어?”
“무슨 해결을 해 너랑 내가.”
“다시 잘 해보기로?”
“하.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이게 진짜 사람이 좆병신으로 보이나….”
허탈하게 웃은 한빈이 마른 세수를 했다. 붉게 젖은 스티로폼 위로 젓가락을 던졌다.
“그건 고소 안 하겠단 소리였잖아. 무슨 사랑이 삼세판이야? 안 되면 다시 하게?”
“오올~ 말빨 좀 늘었네 형.”
“언제 정신 차릴래 칠백아. 너도 자립이란 걸 해. 부모님 속 그만 썩이고.”
“이런 말 해주는 거 보면 형도 나 많이 걱정했나봐. 홀로서기 기다려주는 거 찐사잖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븅아….”
내 주변엔 왜 이런 새끼들밖에 없지? 한빈이 관자놀이를 짚던 그 순간.
“소주병이 애인이야?”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가슴을 덜컥 무너뜨렸다. 그딴 거짓말을 하고 도망쳤는데 고작 편의점 앞에서 걸리고 만다.
이것은 어떤 사랑의 첫장면과 닮았다. 성한빈은 칠백과 조우하고 그 뒤엔 장하오가 있는 이 장면. 개 같게 원점이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뒷머리를 긁던 칠백이 짐짓 뒷걸음질쳤다. 장하오가 소주병과 그의 머리통을 번갈아 보았다. 고개를 숙인 한빈은 툭 한숨을 뱉었다. 술이 좀 들어가니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전에 사랑의 사 자도 모르면서 뭐라도 된 양 구제 본능을 운운했던 성한빈은 지금 딱 죽을 맛이라고. 사랑은 남을 구제하려드는 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하는 거 같다고. 어디까지나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인데 난 지금 형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그래서 살려달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 어차피 나는 형한테 꽝이잖아. 형은 남자 안 좋아하니까.”
맘처럼 되진 않는다 또. 숱한 희망 고문에 지쳤기 때문일까.
선 채로 소주병을 빼앗아 든 장하오는 의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란 기색도 없이.
“누가 응모도 안 해보고 당첨이 돼. 한빈아.”
장하오 손에 들린 소주가 꼴꼴꼴 바닥을 적신다. 둘은 쏟아지는 그것을 보고 있다.
“아니, 당첨 필요 없어. 이제 안 좋아해. 곧…… 그렇게 될 거야.”
“맞아?”
“응.”
“잘 해봐 그럼.”
나른하게 웃은 장하오가 플라스틱 상 위에 소주병을 툭 내려놓았다. 이내 청바지 주머니 안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발등까지 까딱거린다. 이런 순간에 저런 여유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어 잘할게. 이제 그만 집에서도 나가줘.”
반면 성한빈은 여유가 없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게 성한빈의 사랑이 망한 이유일까. 여유라는 건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것이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는데 돈 주고 살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여유도 사랑도. 어떤 사랑은 돈으로 된다던데 왜 그 모든 경우의 수가 성한빈을 비껴 나갈까. 앞에서 입술을 비죽인 장하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진짜 나가?”
“어 진짜.”
말은 뱉어졌고 시간은 흘러갔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성한빈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럼.”
장하오가 몸을 숙였다. 입술이 귓바퀴에 닿을 듯 가까이 붙었다. 한빈이 움찔거리며 집업 안으로 어깨를 옹송그렸다. 이런 순간에도 술냄새가 날까 걱정이 됐다.
“응.”
“언제 시간 될 때 나 좀 알아봐.”
“뭐?”
여기서 대체 뭘 알아야 하는 건데. 한빈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툭 꺼져버렸다. 마감 시간이었는지 알바가 나와 자물쇠를 잠갔다. 그 바람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장하오를 응시하던 한빈이 중얼거렸다.
“뭐,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작게 웃은 장하오가 한빈의 어깨를 잡아끌어 세우던 순간, 가로등 불빛이 환히 켜졌다. 어떤 표정일까 궁금했는데 장하오는 예상보다 더 건조한 눈빛이었다.
“니가 직접 와. 발자국만 보지 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취기 때문인지 단박에 이해가지 않았다. 암호 같아. 어렵다. 어려워. 사랑을 누가 알기 쉽게 가르쳐 줄 순 없는 건가. 거저먹을 수 없는 건가. 아랫입술을 깨문 성한빈은 멋모르는 생각만 했다.
-
그 다음 날 장하오는 정말 집을 비웠다. 진짜 한다면 하는 미친놈이었다. 이불에 파묻힌 성한빈은 오전 내내 피가 날 정도로 입안을 씹었다. 오후 느지막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나왔다. 빈 방을 청소하다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수십장의 복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성한빈이 꽝 낙서를 해놓은 복권이.
예전부터 청소하려 해도 거실 식탁 위에 쌓여 있던 복권들은 항상 어디론가 사라졌다. 먼저 치워준 건가, 생각하며 넘어갔던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무려 반년 가까이였다.
잠자코 복권들의 뒷장을 넘겨본 성한빈이 침대맡에 앉아 입을 막았다. 그것들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내렸다.
이내 얼굴에 손등을 대고 고개를 천장으로 들어올렸다.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복권 발행일 23.04.28
오늘 식탁에서 복권을 주웠어
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봐
행운 같은 거
내가 이 집에 왜 왔는지 니가 알면 싫어할까?
아직 모르겠어...
오래 걸려도
널 찾아온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행복을 줄게
복권 발행일 23.05.04
웃을 때 귀여워서 한참을 봐! ㅋㅋ
볼에 손가락 자국 누가 준 거야?
질투나
하나님?
난 발자국인데...
복권 발행일 23.05.27
성한빈... 요즘 나 보고 몰래 웃어
장하오 당첨 된 듯
복권 발행일 23.06.11
한국에서 혼자 고립된 기분이었는데 너 덕분에 좋은 기억이 많이 늘어났어. 너도 그럴까? 나도 너에게 등불 같은 존재이길.
복권 발행일 23.06.13
장하오 당첨 축하합니다 and
Happy birthday to you
선물은
나예용♡
복권 발행일 23.06.16
아파서 같이 병원...
아프지마
왕자 슬퍼
복권 발행일 23.06.27
시험 끝
너는 왜 피곤할 때도 좋지
뻥이야
그 정도 아님
복권 발행일 23.07.02
답답해... 왜 안 물어보는 거야?
눈 피하지 마
우리에겐 생략된 말들이 너무 많아
복권 발행일 23.07.25
슬퍼
복권 발행일 23.08.12
요즘 너무 바빠서 토가 나와
교수님 못생김
성한빈 보고 싶다
복권 발행일 23.08.31
달이 가까이 고개 내민 날
작업실 나와서 바로 전화를 걸었어
달에 대해 얘기할 때
너는 왜 울었을까
달이 가까운 건 착시고
우리는 달보다 멀리 있지 않은데
복권 발행일 23.09.01
아직 이러면 안 되는데
이미 사랑해
매일 참고 있어
복권 발행일 23.09.03
아파
복권 발행일 23.9.20
성한빈 남친 이름이 겁이야?
장하오잖아.
늦지 않게 와
기다리고 있어.
욱신거리는 가슴을 쓸던 성한빈이 문지방을 밟고 방을 벗어났다. 곧장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 위 이불을 높게 들었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장하오의 연락처를 띄어놓고 한참이나 입술 거스러미를 뜯었다. 이내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홀드키를 눌렀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것마저도 장하오가 가르쳐줘야 알아먹는 자신이 답답하고 병신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모르는 게 죄였다. 엄지가 하얗게 짓무를 때까지 액정을 문지르며 한숨을 삼켰다. 곧 헛웃음이 터졌다. 이제 장하오 없으면 어떻게 살까.
나 형 없으면 못 사니까 형이 좀만 기다려줘.
이건 마지막 한심한 짓이다.
-
건축학과 장 선배는 보기완 달리 사랑을 숭고하게 여겼다.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더러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딴 건 싸구려 사랑을 허겁지겁 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받아주지 않는 건 그중에 귀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의문이었다.
멀리서 봤다고 왜 연락을 하지? 이상하네…. 한눈에 그 사람과 만나서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납득 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온전한 해석도 없이 만나는 게 과연 사랑이냐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을 첫눈에 반하게 했던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급물살을 타고 와장창 부서진 날은
멀리서 맥북이 날아온 그날이었다.
분명 성한빈은 무언가 짓는 일을 하면서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하는 시늉을 했고. 유능하단 평판을 달고 무능한 놈들만 만났다.
한눈에도 수십 가지가 읽히는 사람이었다.
장하오는 단번에 인정하게 된다. 자기가 틀렸다는 거. 첫눈에 반할 수 있다. 관심이…… 생긴다. 뭣도 모르고 혼자 그 사람을 해석하면서 미친 듯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멀쩡한 집 놔두고 미친놈처럼 남의 집에 하숙생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숙의 의미도 몰랐던 외국인이.
반면 성한빈은 먼저 사랑해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사랑 받는 그는 사랑을 신문처럼 들고 다녔다. 언제 잃어버려도 대체할 것이 있는 듯했다.
그럴지라도 사실 사랑은 단 한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기 위해 분투하는 일이다. 선택과 혼돈 그리고 결단과 쟁취의 역사다. 성한빈은 좀, 애써 볼 필요가 있었다. 장하오 역시 크게 다른 입장은 아니었다. 애초에 먼저 반한 입장이니 그를 넘어오게 만들어야 했다. 밤새 졸작을 만들다가도 [형 뭐해] 위챗 한 줄에 설계실을 벗어났다. 우산을 씌워준다는 사람을 마다하고 빗속으로 뛰어들어 비를 함께 맞았다.
걔가 버리는 꽝 복권들을 모아 사실 꽝이 아니라고
글씨 위에 엑스자를 더하고
장하오 당첨 장난스레 적어준 다음
내가 너를 얼만큼 사랑하는지 적어두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믿어주었다.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도 믿어주었다. 성한빈에겐 그런 반응 하나하나가 상처였겠지만, 이따금 사랑하는 만큼 거리를 두어야 했다. 성한빈이 장하오를 좀 더 오래 사랑하도록. 둘의 간격을 성한빈 스스로 좁히도록.
아무것도 몰랐던 성한빈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남자를 내쫓아버렸다.
이제 두 번은 못 간다. 발자국은 한 번으로 끝이다.
이번엔 성한빈이 와야 한다.
-
이따금 붉게 탄 낙엽이 쏟아지던 날, 우체국 집배원이 대문을 두드렸다.
“성한빈씨 되세요?”
철문이 덜컹거렸다. 한빈이 문밖으로 얼굴을 빼냈다. 시멘트 냄새가 났는지 집배원이 코를 킁킁거렸다.
“네 전데요.”
“준등기예요. 여기 싸인 좀.”
이내 오토바이 배기음이 동네를 울렸다. 잠자코 준등기를 내려다보던 한빈은 그것을 뜯어보려던 그 순간, 도로 마루에 내려두었다. 미장 다라이를 들어 한 남자의 발자국 옆에 시멘트를 덧발랐다. 이내 그 위로 발자국을 하나 찍었다.
새로 산 아이보리색 컨버스를 신고.
이게 장하오란 문제에 대한 성한빈의 답이었다. 만족스레 바라본 후 마루에 털썩 앉아 준등기를 뜯었다. 조명 아래 서 있는 장하오와 조형물이 인쇄된 회색빛 팜플렛이었다.
<여는 글>
장하오, 기획자, 건축학과 5학년 재학
사람의 열 손가락은
열 달 배 아파 낳아주신
어머님의 은혜를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성선설의 증거다
그 손으로 짓는다
사람을 위한 건물을
나는 사람이 선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비로소 살만한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믿기로 한다
한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해도
그가 사랑 안으로 걸어오는 시간을 보채지 않는다
편히 기댈 공간을 지어둘 뿐이다
그 자리에서
영원히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짓는다
그게 할 일이다
2024 국인대학교 건축학과 건축전 졸업작품전시회 <성선설>
전시 연계 프로그램
1. 큐레이션 토크: 2023. 10. 20 (금)
2. 전시자 라운드테이블: 2023. 10. 05 (목)
3. 비평자 라운드테이블: 2023. 09. 26(화)
4. 전시자 대담
- 2023. 09. 18(수): 장하오 x 안여진
글을 읽어내린 한빈이 팜플렛에 고개를 묻었다. 새 종이 냄새를 가득 삼켰다. 이제 성한빈은 오래된 도서관 책냄새와 새로 인쇄한 팜플렛 냄새를 구별하듯 장하오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물음표를 만드는 그의 행동은 수천 가지 생각을 불러 오지만 사실 그가 이끄는 방향은 명료하리만치 한 방향이었다. 마루 아래 댓돌에 신발 밑창을 긁었다. 예전에 누가 그랬듯이. 이제 성한빈은 그의 흔적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파란 대문을 열었다.
비로소 사랑에게 가는 길이었다.
+
낙엽이 발치에서 부서졌다. 푸른 이파리는 여름 해에 타올랐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누군가를 숨 쉴만하게 만들어 준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모든 뜨거웠던 기억들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성한빈은 안도했다. 죽을 것처럼 마음이 타들어가던 그때에도 그들의 사랑은 자라나고 있었다. 그토록 아팠기에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다. 해가 뜨겁던 여름. 우리가 함께 했던 밤. 기와 아래 기억은 추억으로 젖어들었다.
검은색 코트 어깨선 위로 줄 이어폰이 달랑거렸다. 추억에 젖어 걷던 한빈이 멈칫했다. 전시회에 가는 길, 신호등이 푸르게 빛났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속에서 성한빈은 살만한 얼굴로 가을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난 여름, 어떤 말의 안쪽을 한참이나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별 일 없으면 날 생각해. 그 말은 단번에 이해 가지 않아서 내내 골몰해야 했다. 한 차례 계절을 지나 빈틈 없이 장하오 생각을 하게 된 후에야 알았다. 그를 만나고 사랑받지 못한 순간이 없었다는 걸.
전시회장 뒷문에 들어서자 한눈에도 훤칠한 장하오가 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종이컵에 입을 대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오전부터 진행된 전시회이기에 조금 피로한 탓일까. 그는 콧등을 검지로 쓸었다. 한빈이 낙엽을 밟으며 인기척을 내고서야 그가 돌아보았다. 한빈은 건물로 들어가는 일행을 뒤로하고 다가서는 장하오의 심장 언저리만 쳐다 보았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복권용지를 매만졌다. 천천히 눈을 들자 장하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성한빈을 유심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있던 종이컵의 허리가 구겨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나 왔어.”
당연한 소리를 자신 있게 뱉은 성한빈이 만개하듯 활짝 웃었다. 웃는 사람 앞에 욕은 안 할 거란 자신감인지 뭔지, 아님 좋아죽겠어서 상황 파악도 안 되는 바보가 된 건지. 벌건 낙엽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지는 계절에 성한빈만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거 봐. 나 당첨 엄청 많이 됐다? 대박이지. 그래서 형 책임지려구.”
주머니에서 꺼낸 건 복권 용지였다. 살짝 이맛살을 구긴 장하오가 낮게 웃으며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두 손에 하얀 양뺨이 가득 담겼다. 성한빈은 볼이 잡힌 채로 웅얼거렸다.
“사람들 보는데.”
이내 줄 이어폰의 한쪽을 빼 건네자 장하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꼽고 넌지시 주변을 훑은 장하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둘 사이를 연결한 실처럼 이어폰 줄이 흔들거렸다.
“보라고 해.”
“…꽃다발 깜박했다.”
꽃은 깜박했다며 민망한 얼굴로 말하는 성한빈의 목덜미에선 머스크향이 났다. 둘은 콧등을 맞대다시피 기대었다. 옆에서 나무가 바람을 타고 술렁거렸다. 고갤 숙인 성한빈은 아이팟 재생 버튼을 엄지로 눌렀다. 그의 생일날 건네지 못한 선물을 이제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 주고 싶은 건 아이팟이 아니라, 여기 들어있는 마음이었다. 귓가에서 노래가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장하오의 입술이었다. 발 아래 낙엽이 비켜주듯 타닥타닥 멀어져갔다.
*함민복 시, <성선설>
─놀라지 말고 들어.
환전소 앞은 시장통을 방불케했다. 자기야 뭐라고? 안 들려, 크게 말 해! 피처폰에 대고 소리치던 한빈이 번뜩 신음했다. 통화 화면을 보며 조그맣게 혀를 내밀었다. 음성 메시지가 무슨 수로 큰 소릴 낼까.
청바지 뒷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상점들을 끼고 있는 쇼핑센터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을 파는 건지 물건을 파는 건지. 후덥지근한 공기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빈은 인파에 휩쓸린 채 앞으로 나아갔다. 비좁은 길목에 모여 수상하게 웅성거리는 아프리카인들. 가게 모퉁이에서 계산기 두들기며 고성을 내지르는 인도인 사장. 파란 눈의 관광객. 혼잡한 건 이 도시의 특기였다. 눈 뜨고 코만 베이는 게 다행인 도시. 침사추이였다.
상가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즈음 크로스백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동시에 따듯하고 주름진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덜컥 간담이 서늘했다. 이런 건 넣어둔 적 없었다. 사람 손. 사람 손이었다. 고개를 틀자 목울대가 일렁였다.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캡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난데없이 한빈의 나이스한 하루를 빌었다. 한빈은 상냥하게 웃으며 응수했다. 손 빼 이 새끼야. 용케 알아들은 사내는 어깰 으쓱거렸다. 이어 매몰차게 등을 보였다.
주위를 흘금대던 한빈 앞에 빈 바구니가 성큼 튀어나왔다. 필리피노와 익숙한 듯 눈인사했다. 그의 뒤에 때깔 좋은 과일이 널려 있었다. 자알 익었네에. 한빈이 너스레 떨자 필리피노가 웃었다. 그의 존재가 반가웠던 탓이다. 한빈은 이 가게의 큰 손이었다. 바구니가 알록달록하게 색감을 채워갔다. 허공에 손이 멎은 건 그때였다.
손가락끼리 부딪치자 바짝 정전기가 통했다. 다른 과일로 방향을 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남자의 손이 한빈을 따라오고 있었다. 뭐야. 한빈의 눈길이 맞은 편 남자를 향했다. 귀가 크고 이마뼈가 도드라진 남자. 그가 어딘지 텅 빈 눈으로 한빈을 응시했다. 그늘 서린 이목구비. 은은하게 흐르는 건조함. 유약하고 우울한 냄새. 남자의 인상엔 유순함과 서늘함이 공존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너무 강렬해서 외려 달갑지 않은 인상. 하지만 한빈은 몰랐다. 그 남자를 십 초가 넘도록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생긴 남자 좋아해?”
“뭐?”
한빈이 고개를 내뺐다. 나?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남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쳐다보잖아. 멍청하게.”
“내가 미쳤나… 나 여자 좋아해.”
“그래?”
“참나.”
유약한 남자는 오만한 나르시시스트였다. 한빈이 허겁지겁 계산대에 바구니를 내밀었다. 가방을 뒤지던 손이 헛돌았다. 내 코끼리 동전지갑. 어디 갔지. 좀전의 상황을 떠올린 한빈이 허탈한 듯 웃었다. 그새 당했네.
난감한 얼굴을 한 한빈의 뒤로 남자가 섰다. 한빈이 뒷걸음질치며 비켜섰다. 주인은 몸을 틀어 그를 불러세웠다. 자랑스레 손가락을 내보였다. 중고 은반지.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프로포즈 성공했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더불어 자신의 약지를 내밀었다. 타지에서 동향이랑 연애한다는 거 진짜 낭만이고 신기한 일이야. 운명 같고.
종알대는 한빈의 뒤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게 무슨 운명이야.”
너무 날카로운 투라 한빈은 찔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한 말이에요?”
“너 아니면 여기 운명 누가 말 해.”
애매한 데서 조사 빼먹는 거 보면 외국인인데. 어눌한 듯 유창했다. 문법은 고사하고 말투가 완벽히 한국인이었다. 한빈이 까뜩 이를 씹었다.
“그쪽 나 알아? 왜 시비,”
“아니라고. 운명.”
“그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게 운명 아니면 뭔데?”
“우연.”
“뭐?”
“운명이면 헤어짐도 없지. 유통기한 있는 운명? 그런 게 있나?”
“누가 헤어진대? 나 안 헤어질 건데?”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하나봐.”
“…….”
그들 뒤로 바짝 정적이 따라붙었다. 침묵을 삼키던 한빈이 그를 미심쩍게 응시했다. 어디서 차이고 왔나. 누구한테 화풀이야.
“운명 같은 건.”
“…….”
“너가 오늘 10초로 내 생각만 하게 되는 거.”
“…….”
“이 남자 뭐지? 궁금해 미치는 거. 그리고 다시 나를 만났을 때 당신 뭐야? 묻는 거. 그런데도 영원히 궁금한 거. 그런 게 운명이지.”
남자는 얼토당토 않은 것을 운명이라 주장했다.
“뭔…….”
“그럴 일 없잖아?”
“없지, 미쳤나.”
“그러니까 운명은 없는 거야.”
한빈이 벙졌다. 대체 무슨 소리야. 대화 내내 해독을 하는 기분. 그의 어투는 꽤나 확신에 차 있어서, 머릿속이 교통 체증을 앓는 도시처럼 혼란했다. 운명이란 거, 어쩌면 내가 진짜 모르는 게 아닌가? 운명이 뭐지? 운명이 존재한 적 있나? 운명을 마주친 적은 있나?
거대한 퀘스천마크를 던진 그는 한빈의 과일까지 계산해 버리고 홀연히 자릴 떴다.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파 속으로 뒤섞이는 그가 작아지는 동시에, 여전히 거대해 보였다. 한빈은 허름한 가게 조명 아래서 눈을 깜박였다. 이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장면을 전환할 때 영사기가 돌아가듯, 철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오후의 침사추이는 쥐어짜면 구정물이 나올 듯했다. 골목부터 번화한 스트리트까지. 곳곳에 매연과 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스팔트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한빈은 횡단 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피처폰을 귀에 댔다. 음성 메시지함에 들어갔다. 동시에 신호등이 초록불을 띄웠다. 횡단보도를 거닐던 그의 낯빛이 어두워진 건 그때였다.
─헤어지자. 우리는 운명이 아닌 것 같아.
폴더를 고쳐잡았다. 손목에서 봉지가 미끄러졌다. 망고 대여섯개가 보도 위를 굴렀다. 순식간에 내용물을 비운 검은 봉지가 바람에 부대꼈다. 삽시간에 주위의 시선이 한데로 몰렸다. 한빈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오묘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이별의 충격보다 한 남자가 떠오른다. 유약하게 생겨서는 신처럼 구는 그 남자. 황당했다. 헛것을 본 건가. 정말, 신인가? 방금 빠져나온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클락션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빽빽한 차들이 생선 눈알 같은 눈을 달고 한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은, 날 것처럼 생생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집앞이었다. 한빈은 복도 벽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꼴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마음과 달리 주정을 부렸다.
너무 좋아해서 췌장까지 아파 본 적 이써요? 내장이, 흡, 다, 허엉, 곪아버린다고요.
슬픔을 과식한 사람처럼 목이 막혔다. 망가진 장난감처럼 늘어지던 한빈의 아래로 해석이 필요한 남자, 장하오가 무릎을 세워 앉는다. 그는 한빈이 문고리에 끼우다 실패한 키를 내려다본다.
“우리 이웃이네.”
기다란 복도를 휙 돌아본다. 이따금 인도인 무리가 정체불명의 경을 외는 곳. 매일밤 누군가 엘리베이터 옆에 피자를 만들고 경비원 대신 거미가 상주하는. 장하오와 성한빈은 그런 곳의 이웃이다.
한빈은 말 할 때마다 사이사이 의성어를 남발했다. 허엉. 음, 흑. 아양이 익숙하게 흘러나왔다. 이 남자는 술이 들어가면 혀가 엉성해지고 헛소리를 늘어놓나. 하오가 이마뼈를 긁었다. 이 남자는 엉뚱하고 골때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장하오는 역겹다는 얼굴을 하지 않는다. 외려 볼만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볼을 찌른다. 피자 도우처럼 부드러운 볼에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사랑 마니 해써?”
장하오가 비스듬히 고갤 갸웃거린다. 입가에 풍선껌이 터졌다. 네 마니 해써요…. 한빈이 살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부서졌다. 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대용품이었대요.
으음 그렇구나. 마니 해써어. 남자는 경쾌하게 대꾸했지만 표정은 그닥 유쾌하지 않다. 대용품. 그건 뭐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도중에 대화를 관둘 수도 있었으나. 성한빈이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고분고분하니까. 살짝 핀트 나간 듯이 굴 때 기묘한 매력이 있으니까. 오밤 중 만담을 이어간다.
“내 생각은 마니 해써?”
“그것도, 음…….”
쪼금? 진짜 쪼금.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거짓말을 못하는 한빈은 입술만 달싹였다. 시선이 구슬처럼 남자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단숨에 얼굴이 끌려갔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얄쌍한 얼굴을 손에 쥐고 종알거렸다.
“직업이 모에요? 나이는…… 몇 살?”
“나이? 작살.”
“에이씨.”
“장난이고. 만살.”
“직업은… 백수?”
“아니, 만수.”
“야.”
“웅?”
“나 성격 조은데, 넌 너무 이상해. 그래서 나도 막, 좀, 안 좋아질 거 같아….”
“나 안 좋아?”
“그 말이 아니자나!”
한빈이 몸을 내던지듯 남자에게 안겼다. 남자가 자신을 향해 쏟아진 한빈의 두 팔목을 그러쥐었다. 판판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한빈이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취기가 오른 듯 눈을 감았다. 동시에 남자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둘 사이로 흐르는 정적. 어디선가 개가 컹컹 짖었다. 인도인이 경을 외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장하오가 고개를 내렸다. 발치를 구르는 디올 립스틱. 언뜻 익숙한 생김새에, 하오가 물었다.
“이거 뭐야?”
“어, 그거.”
“응 이거.”
“선영이거야! 내놔.”
기둥에 몸을 부딪친 하오가 깊은 신음을 뱉었다.
뼈 부러진 것 같은데. 뵹언 가야 돼. 그 말에 덩달아 놀란 한빈이 그를 끌어안았다. 미아내요. 용서해줘. 몸 하나도 못 가누면서, 한사코 빌었다. 두 손을 비비며 참회했다. 피에타상처럼 장하오를 품에 넣고서야 참회는 멎었다. 지그시 한빈을 보던 장하오가 손을 뻗었다. 그의 구부러진 상체를 반쯤 세웠다. 한빈이 관절인형처럼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애처롭게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용서 받고 싶어? 뵹언 가야되는 사람치고 발음이 뚜렷했다. 으응… 네. 하오가 좋은 생각이 난 듯 립스틱을 빼들었다. 시선이 넓은 가슴 주위를 맴돌았다. 킥킥거리는 그의 등뒤로 전등이 깜박거린다. 하얀 도화지 위로 붉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듯, 한빈의 셔츠가 엉망이 되었다.
저는 남자에 미친 게이입니다♡
잘생긴 당신이 용서해주세요
만족스러운 듯 한빈의 귓바퀴에 대고 읊조렸다. 용서할게. 한빈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대로 넉다운. 고꾸라진 한빈의 숨을 삼킨 하오가 혀를 찼다. 알콜냄새가 진동했다.
눈을 뜨자 천장. 먼지 쌓인 실링팬이 바쁘게 회전했다. 한빈은 카펫을 이불 삼아 자고 있었다. 뻑뻑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잠자코 어제 일을 떠올리다 번뜩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뭐했지. 퇴근 후 지인의 위스키 바에서 이름도 모르는 위스키를 식도에 때려 부었다. 가게를 나와선 떠돌이 개한테 쫓기다 용케 집 가는 트램을 탔는데.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 우울하고 잘생긴 남자. 기어코 현관에서 자겠다고 투정하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머리를 헝클였다. 미친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목재 손잡이를 당겼다. 옷장 안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진동했다. 한빈은 단추를 내리다가 경악했다. 다 벗고 나서야 깨달았다. 옷이 왜 이래. 남자에 미친, 뭐?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열쇠도 없었다.
520호 앞에 서서 소리질렀다.
“이봐요 문 열어. 안 열어? 도둑이야? 왜 남의 집 키를 가져가고… 아니, 저기요. 죽으셨어요? 죽고 싶나?”
벌컥 문이 열리자 한빈이 단번에 얼어붙었다. 고도 낮은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팬. 그 앞에 상체를 탈의한 장하오는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렇게 팬 적 없는데.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다. 판판한 가슴 아래로 뚝뚝 물줄기가 흘렀다. 멍으로 물든 복근. 살짝 불룩한 트레이닝 바지. 윤이 도는 이마뼈. 깔아보는 시선에서 기묘한 전능감이 일었다.
“그러면 안 되겠죠.”
“…….”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죠… 예수님이. 죽이면 안 되죠 그럼…….”
“그랬어?”
앞에 ‘걔가’는 생략됐다. 예수가 동네 아는 애 이름인 듯한 반응. 한빈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죄송합니다. 어제 실례를….”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마치 믿는 신은 자신뿐인 듯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린다.
“용서했잖아 어제.”
가슴으로 날아오는 키를 끌어안았다. 가차 없이 문이 닫히던 찰나였다. 그 사이로 신발이 끼어들었다.
“사람 패고 다니세요?”
웬걸 호기심이 일렁였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어제 수확이 없어서일지도. 이 남자 성격상 맞고만 다니진 않을 것 같은데. 한빈은 발 끝에 힘을 주었다. 신발을 내려다보던 장하오의 미간에 금이 갔다.
“알 거 없잖아?”
없잖아, 가 아니라 업짜나였다. 귀를 의심한 한빈이 눈썹을 꺾었다. 뭐지. 이 애교 많고 폭력적인 외국인은.
“아니 저도 제가 미친 거 아는데 그쪽이 저한테 무슨 주문? 저주? 그런 걸 한 것 같아요.”
“무슨 말이야.”
“참말이요.”
“와.”
“…….”
“성한빈 웃기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지? 하나부터 열까지 엉터리에 의문뿐인 대화. 의구심이 치밀었다. 하지만 기묘한 만담을 끊기 어려웠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 남자, 모르는 게 없어 보인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걸 맹신이라 하겠지만.
“제가 좀. 원래가 유쾌해요.”
“나 웃겼으니까 하나 알려줄까?”
“……네.”
“나는 본토 사람 아니고 홍콩 사람. 학생 때 이주 왔지. 그런데 광둥어는 서툴러.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아아. 한빈이 가만 수긍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어떻게 한국말을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분명 수확을 있음에도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애인이 한국인이에요?”
“무슨 의미지?”
“광동어가 서툰데 한국어는 잘해서요.”
“아~ 맞아. 한국 사람.”
“역시 그랬구나.”
“근데 지금 없으니까 안심해.”
“무슨.”
어이 없는 말놀음이 이어지자 한빈이 허공을 보며 웃었다. 됐다. 대화는 무슨. 이렇게 까불고 다니다 어서 맞았겠지. 붕대 감은 꼴을 보고 솟구치던 연민이 빠르게 꺼져버렸다. 한빈은 명함을 내밀었다. 오오~ 장하오가 성의 없이 감탄하며 읽어내렸다. 한빈은 알아서 자신의 신상을 읊었다. 주재원 성한빈. 위에 써 있는 건 회사예요. 보이시죠. 아트인홍콩 배급사.
다친 곳에 문제 생기면 연락주세요. 치료비 드릴게요.
하오가 검지로 명함 모서리를 쓸었다. 멀끔하게 차려 입은 한빈을 훑었다. 출근길인 듯 가죽 백팩을 매고 있었다.
돈 많이 벌어와. 나 치료하려면.
윙크를 날리자 한빈이 픽 웃는다. 엄살 부리지 말고요. 520씨.
트램에 몸을 실은 한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빌딩숲을 넌지시 보다 혼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520씨가 뭐냐. 다음엔 이름을 물어야지.
지하철 전동차가 전조등을 쏘며 들어온다. 한빈은 젖은 우산을 털었다. 그를 알아내는 것을 실패한 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그는 주로 낮부터 집을 비우고 저녁 늦게 귀가한다. 알만한 건 거기까지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 플랫폼 앞에 서 있던 한빈이 어느 부근에서 발등을 세웠다.
그 남자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 남자가 줄 이어폰을 끼고 있다. 말랐지만 큰 체격과 동그랗고 높은 콧대. 한빈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전동차가 멎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한빈은 그 틈에 섞여들었다. 인파 사이에서 장하오가 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빈은 얼결에 그의 뒤를 밟았다. 센트럴역을 지나자 비로소 차 안이 한산해졌다. 한빈은 차창에 기대 맞은 편에 서 있는 그를 훔쳐보았다. 이윽고 표정에 금이 갔다.
뺨에 큰 자상을 가진 남자가 주위를 살폈다. 장하오는 그와 반대편으로 멀찍이 시선을 던졌다. 남자가 다른 방향을 보자 건조한 얼굴을 쓸며 그를 주시했다. 장하오가, 어떤 남자를 미행을 하고 있었다. 닷새 전 보았던 장하오의 험한 꼴이 떠올랐다. 몸을 쓰는 일을 하나. 청부업? 본 게 많은 탓에 머리가 그런 쪽으로 돌아갔다. 한빈은 배급작을 선별할 때처럼 이 장면의 맥거핀을 찾고 싶었다. 이건, 이건 분명……
“한빈! 퇴근하는 거야?”
“어?”
동료가 그를 불러세우는 바람에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료의 뒤로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한빈은 잇살을 씹었다.
어둑한 복도 중앙으로 백열등이 깜박였다. 들고나온 어항 속 물이 찰랑였다. 쌍둥이 금붕어 중 하나가 움직임이 적어졌다. 치료법을 몰라 몽콕 금붕어마켓에 가볼 생각이었다. 문을 닫자마자 한빈은 멈칫했다. 그 남자였다. 거리에 버려진 넝마처럼 비에 젖은 남자는 줄이어폰 하나를 대롱대롱 끼고 있었다. 유닛 하나가 부서진 채였다.
“하나가 이상해서. 얘네가 짝인데, 하나가 가면 안 되니까.”
한빈이 괜스레 어항을 들며 밑동을 쳐다봤다. 하오도 자신의 엉망인 옷을 내려다 보며 딴청 피웠다. 하나를 모르고 밟아버렸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였고. 그래도 노래는 들리던데. 어깨를 으쓱이자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뭐가 정상인 게 없네. 불쑥 말을 꺼낸 건 한빈이었다.
“도둑이세요? 아님 청부업? 제가 편견 없는 쪽이라. 아시다시피 제가 별 거 다 보고 살 거든요. 그쪽 사는 것도 나름 예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거랑 연관이 없진 않아.”
남자가 처음으로 그럴 듯한 대답을 했다. 한빈은 잠자코 고갤 끄덕였다. 아. 그런 쪽이시구나.
“그쪽 말대로 저랑 그 여자 운명 아니었어요.”
“그래?”
“네. 운명이 아닌 것 같아, 하던데요.”
“오오.”
“제가 어떤 남자랑 닮아서 좋았대요. 저한테 누가 보여요?”
무심히 한빈을 들여다보던 하오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내가 보이는데. 네? 네 눈에 내가 보여. 그 말의 의미를 가늠하던 한빈이 깨달은 듯 아, 입을 벌렸다. 눈동자.
한빈의 빈 약지를 보던 그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한빈은 복도 창틀에 어항을 내려놨다. 어항 안을 지그시 응시했다. 금붕어 하나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쇠창살 너머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금붕어를 향해 시선을 둔 채 한빈이 말했다.
“그니까 그쪽이 다 맞았어요. 진짜 남자에 미쳤나? 계속 그쪽이 생각이 나요.”
“…….”
“혹시 안달나게 만들고 사람 버리는 거 잘해요? 아비정전 아비처럼 개새끼짓 하는 거 즐긴다거나.”
“뭐?”
한빈이 고갤 틀었다. 치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생긴 남자가 목덜미에 멍으로 그림까지. 장관이었다. 멍이 난 길을 따라 눈을 굴리던 한빈이 가볍게 혀를 찼다.
“제 머리가 좀 영화로 돌아가요. 그냥 그게 생각나서.”
“아무나 안달나게 하진 않아. 안달나지도 않고. 그건 다 상대를 보고 하는 일이야.”
“제가 알 만큼은 아는데요.”
한빈이 뻑뻑한 눈알을 꼭 감았다 떴다. 잠시간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그쪽 같은 사람은 제 운명이 되기에 너무 별로예요. 사람이 되게 불투명해서. 저는 일기 예보 꼬박꼬박 보고요. 우산을 안 챙긴 적이 없어요.”
“…….”
“함부로 젖는 거 싫어요.”
남자의 귓볼에서 뚝, 빗물이 떨어진다. 한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쪽 생각 그만한다구요.”
“왜?”
“네?”
“이웃을 사랑하랬다며.”
“…….”
“아픈 이웃 장하오를 사랑해줘야지.”
장하오는 터무니 없는 개소리로 또다시 연민을 샀다. 이 미친 남자는 약하고, 또 고약하다. 약한 것도 척일지 모른다. 결국 제 뜻대로 상황을 흘러가게 하니까.
“아. 이름이 장하오구나.”
“…….”
“사랑해요.”
한빈이 말을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가볍게. 이토록 허무하게 사랑을 말한 적, 없다.
이웃으로서. 됐죠?
휑하니 돌아섰다. 어항의 물이 넘칠 듯이 일렁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걸음을 멈췄다. 이어 승강기 문이 열렸다. 등 뒤에서 장하오가 읊조렸다.
“나도.”
맥없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한빈은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열리는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거울 너머로 승강기 문이 장하오를 지워버렸다. 고물 승강기가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제대로 닫히지 않아 틈이 벌어져 있었다. 한빈은 유리에 볼이 눌리도록 어항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문 틈새로 외로움이 들어온 것 같았다. 몇 년이고 빠지지 않을 외로움의 냄새가.
[아파]
[치료비 필요해]
[우리집으로 와]
점심시간이 끝나자 파티션 곳곳엔 커피향이 피어올랐다. 볼펜을 딸깍대던 한빈은 화면 속 활자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계좌번호 알려줘요]
[집은 안 가요]
한참을 공백 상태로 머문 후에야 답을 보냈다.
[금붕어 살았어?]
[불상해]
[ㅜㅜ]
회의실 안에선 팀원들의 대화가 오갔다. 배급을 진행할 작품 명단을 회의하는 중이었다. 이 작품은 이게 마케팅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이건 좀 약하지 않나? 한빈은 어떻게 생각해? 한빈? 한빈은 리스트업 해둔 작품들을 새카맣게 잊은 채 책상 아래 고개를 박고 있었다. 허벅지 위 문자 쪼가리를 노려보다, 짤막한 답장을 써 넣었다.
[계좌번호]
[계좌번호 집에 오면 알려줄게]
[현금으로 줘도 되고]
[얼마 필요한데요]
[100억]
[그 정돈 없어서 못 가겠네요]
[아 잘못 썼어ㅓ ㅋㅋㅋ 100위안]
“성한빈!”
“네?”
“오늘 왜 그래?”
“죄송해요.”
“근무 날짜 얼마 안 남았는데 집중 좀 하자.”
“네.”
한빈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천루 사이로 짙은 해무가 끼어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정오가 지났다.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않은 하루. 기억을 더듬어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장 선명한 게 하필 가장 모호한 남자였다.
-
낡은 브라운관 위로 먼지가 떠다녔다. 화면을 보던 장하오는 입술에 빈 콜라병을 대고 있었다. 이층 버스 경적이 창문을 두드렸다. 리모컨을 들어 티비 볼륨을 키웠다.
브라운관 너머로 연인이 눈밭을 굴렀다. 겨울연가. 눈을 본 적 없는 장하오는 그 드라마를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 펑펑 내리는 눈. 끌어안은 연인. 기억을 잃어도 찾게 되는 사랑. 그런 것들은 낯선 나라의 전설처럼 느껴졌다.
서글픈 테마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하얀 이불 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눈을 구르면 이런 느낌일까. 허공에 손을 뻗자 커튼 새로 흘러들어온 빛이 잡혔다. 담배를 문 입술 새로 하얀 숨이 흘러나왔다. 여유로운 한낮.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턱에 엉덩이를 붙였다.
쇠창살에 등을 기대자 햇볕이 등 뒤에서 부대꼈다. 볕을 등에 얹은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아이리버 씨디 플레이어. 메이드 인 코리아. 재생 버튼을 누르자 불빛이 들어왔다 점멸했다. 안테나를 높이 빼 들어도 노래는커녕 쇳소리만 삐져나왔다.
왜 이래.
이어폰 줄이 침대 위에 쏟아졌다. 미간을 구기며 담배 필터를 씹었다. 그깟 노래 하나 듣겠다고 그 돈을 썼다. 그런데 들리는 게 이거면, 열이 안 받는 게 이상했다. 침대 아래서 오늘 박스째 구한 한국 노래 씨디집이 꺼내 달라 아우성 치고 있었다. 러브홀릭, 버즈, 델리 스파이스. 장하오는 눈썹을 꺾은 채 골몰했다.
비행기로 한국은 고작 세 시간 남짓 거리. 한국 노래가 홍콩 지하 레코드샵에 오기까지 일 년. 그 바람에 아직 2005년 신보를 꺼내 보지도 못 했다. 차라리 한국에 가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자 실소가 터졌다. 가본 적도 없는 곳의 향수가 이리 지독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에펠탑 자석이 덕지덕지 붙은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 한 컵을 따랐다. 비릿한 우유향이 산산이 번진다. 하오는 향을 마시는 것처럼 큰숨을 들이마셨다. 하얀 액체를 목울대가 일렁이도록 연신 삼켜냈다. 평소 우유를 즐겨 마시진 않지만 어제는 달랐다. 편의점 우유 칸을 서성였다. 일 리터짜리 우유팩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불쑥 그 남자가 생각이 난 탓이다.
비닐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다 키득거렸다. 매연에 젖은 빨래들이 널린 거리. 다닥다닥 벽간거리 좁은 아파트숲. 거칠게 닫히는 창문 소리. 드리우는 커튼. 자신을 보자마자 문을 닫은 한빈의 집에 불이 꺼진다. 장하오는 그 밤을 생각하다 대낮에 또 웃음이 터졌다. 창틀에 기대어 그의 되바라진 문자들을 읽다 한 번 더 웃었다. 한국은 요즘 무슨 노랠 듣나. 물어봐야지.
“글쎄요. 잘 모르는데.”
한빈이 뒷목을 긁적였다.
“저도 여기 온 지 오 년이 다 됐어요.”
입술을 비죽인 장하오가 씨디 플레이어를 내려놨다. 극락조에 꽂힌 모종삽을 푹푹 퍼낸다. 애꿎은 화분만 괴롭혔다. 쿰쿰한 카펫 위로 고운 흙입자가 굴러다녔다. 한빈이 모종삽을 주워 다시 화분에 꽂았다. 옆에 있던 탁상이 흔들렸다. 작은 어항 안에 몸을 맡댄 금붕어 두 마리가 파르르 꼬리를 떨었다. 어항 위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금붕어. 행운이 깃듭니다. 한국식품잡화점.
한빈이 금붕어를 향해 턱짓했다.
“한 마리 죽고 다른 애도 같이 갔어요. 외로웠던 건지 뭔지.”
“금방 새로 데려왔네.”
“뭐, 없으면 적적하니까. 밥 주는 재미로 살았는데.”
“…….”
하오가 말없이 두 손을 모아 엄지로 미간을 눌렀다. 빨리 계좌 번호 알려줘요. 한빈이 재촉했다.
“520.”
“장난하지 말고.”
“돈 안 줘도 돼.”
“네?”
“그냥 심심해서 불렀어.”
“우리가 심심하면 부를 사이에요?”
“사랑한다며?”
그걸 믿냐고 항변하려다 멈추었다. 아니, 대답도 하기 전에 일이 벌어졌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장하오가 훌러덩 반팔을 벗어던졌다.
“돈 대신 나 씻는 거 도와줘. 봤지 내 몸. 팔을 못 들어, 아파서.”
그가 뒤를 돌자 한빈은 문득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상처투성이 몸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남자 몸을 난생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귓등이 뜨거워졌다. 거울 앞에 선 하오가 가슴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이 커진 건. ………뭐야.
“아프다고 했잖아.”
갈비뼈부터 심장 부근까지 실밥투성이였다. 너덜너덜. 정말 사람 몸이 너덜너덜했다. 한빈이 미간을 모았다. 누가 한 짓일까. 이렇게 약한 남자 상하게 할 곳이 어딨다고.
“어때. 예쁘게 꼬맸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위험한 일 해요?”
어깨를 으쓱거린 하오가 화장실 전등을 켰다. 누르스름한 불 아래 서 있는 그가 손을 두어번 까딱였다.
들어오면 말해줄게.
얼결에 따라 간 한빈의 손에 들린 건 일회용 면도기였다. 변기 커버 위에 앉은 하오가 한빈의 손목을 이끌었다. 하오의 다리 사이에 갇힌 한빈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위아래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다. 고갤 세우면 그의 너덜너덜한 가슴이 있고. 내리면 덜 묶인 그의 트레이닝 바지끈이 보인다.
“왜 이런지 말해줄까?”
“…….”
“응?”
하오가 어르듯 읊조렸다. 한빈이 그에게 잡힌 두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수갑처럼 답답했다. 이 남자. 이상하고 위험하다. 보통 사람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나다니지 않는다. 엄한 타인을 미행하지 않는다. 아랫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지르물었다.
“나 무서워 하지마아.”
한빈의 떨리는 눈꺼풀을 보던 그가 짧게 혀를 찼다. 한빈이 흘리듯 중얼댔다.
“면도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잖아요.”
“나 못 해. 안 돼.”
한숨을 내쉰 한빈이 선반에서 쉐이빙폼을 꺼냈다. 하오는 부스스한 앞머릴 쓸어올리며 턱을 들이밀었다. 아랫입술까지 부루퉁하게 내민 모양새였다. 뭐 어쩌라고. 발라달라고? 한빈이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얀 거품이 울컥 튀어나와 하오의 뺨을 덮었다.
“나 거품 너무 많아. 지금 산타 할라버지 수염이야.”
하오가 불쑥 뒤돌았다.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고 읊조렸다.
“거품은 원래 많아요.”
“너가 좀 가져가.”
“아 묻잖아, 좀 떨어져요.”
하지 말래도 자꾸 들이댔다. 거품을 턱 끝에 묻힌 한빈이 손사래쳤다. 그럴수록 하오는 장난기를 머금고 입술을 붙였다. 꼼짝없이 어깨가 잡힌 한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통통한 볼, 예쁘게 휘어오른 콧망울, 붉어진 귓바퀴. 하오의 뺨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그가 얼굴을 디밀 때마다 숨결이 부딪쳤다.
한빈은 잠수하는 사람처럼 숨을 참았다. 환풍기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어렴풋이 실눈을 뜬 한빈이 돌연 눈을 키웠다. 한빈의 손등 위로 장하오의 손이 겹쳐졌다.
하오가 고개를 양쪽으로 꺾기를 반복했다. 거품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밀려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한빈.”
“…….”
“너가 골라봐.”
그리고 난데없는 문제 풀이가 시작되었다.
“일 번. 장하오는 잔인하다.”
“…….”
“이 번. 장하오는 잔인하지 않고 귀엽다.”
“…….”
“삼 번. 장하오는 귀엽지 않고 나쁘다.”
엉망인 선택지를 내놓은 장하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술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닦아냈다.
“난 뭐든 될 수 있어.”
“…….”
“니가 원하는 건 뭐야?”
성한빈이 원하는 것. 장하오가 하는 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갗을 문지르던 면도날이 떨어졌다. 한빈이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사 번. 장하오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장하오가 배를 잡고 키득거렸다. 성한빈 천재야.
“연인한테 총 맞아본 적 있어?”
“…….”
“난 그런 일을 해. 연인한테 총 맞아도 싼 일. 잔인한가? 그게 내 일인데.”
“…….”
“그 사람은 이게 자길 덜 사랑해서 받은 벌이래.”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본 장하오가, 턱을 들며 사르르 웃는다. 헤. 나 벌 받은 거야. 가슴에 구멍이 나도 개의치 않는 그에 한빈이 더러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마요.”
“……왜? 궁금했잖아.”
“그냥, 듣기 싫어….”
흐르는 수돗물에 면도기를 닦았다. 하얀 거품이 사라졌다.
“아 왜애.”
한빈이 화장실을 벗어났다. 장하오가 뒤따라 나왔다. 젖은 얼굴에 무언가 팍 날아왔다. 수건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이상한 얘기만,”
“너도 나한테 선영이 얘기 했잖아. 그래서 나도 해.”
“그건 내가 취했을 때고요.”
“아까 나도 취했으어~ 우유 먹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 앉은 그가 너스레 떨었다. 협탁 위 빈 컵의 밑동이 새하얬다. 뒤돌아 떠나려던 한빈의 몸이 순간 기울었다. 침대 스프링이 튀어올랐다. 침대 맡에 주저 앉은 한빈이 버둥거렸다. 손목에 차가운 무언가 닿았다. 수갑이었다. 수갑이 흔들릴 때마다 철창처럼 침대 헤드가 덜컹였다.
“뭐 어떻게 한 거야, 뭐하는 거예요? 미쳤어?”
“난 이런 일을 해.”
“…뭐?”
한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얼결에 반쯤 누워 만세를 하고 있었다. 몸 위로 올라온 하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빈이 비스듬히 고개를 피했다.
“속이고 뒤통수 치는 일.”
“…….”
“쫓아다니는 건 이미 봤잖아.”
한빈의 눈이 커졌다. 그날 지하철로 돌아간다. 성한빈이 역사 층계참을 내려오던 순간. 우산을 털기 전. 장하오는 이미 뒤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남의 죄를 팔아 빌어먹는 일. 잠입, 속임수, 미행, 신분변조. 형사인 그는 매일 정의를 위해 위악을 일삼았다. 이따금 사람들은 그가 깡패인지 형사인지 헷갈려하지만, 구분이 필요 없는 것이기도 했다. 진흙탕에 뛰어든 놈에게 진흙이 묻지 않을 리 없으니. 세상엔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다는 건 그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사복형사는 이 도시의 악랄한 수호자였다.
“형사가 뭐하다 연인한테 총까지 맞고 다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의문이 부글거린다. 범죄자를 사랑했나.
“그건 다음에. 오늘은 끝.”
멋대로 끝을 정한 그가 수갑을 풀어냈다. 수갑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내일도 와야 돼. 수염은 매일 나. 볼사탕을 만든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두드렸다. 오늘 또 할 말 없어? 그리고 마치 들을 말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거 없어요. 가벼이 쳐낸 한빈이 쌩하니 뒤돌았다.
520호.
문패 아래 상체를 기댄 한빈은 손목을 매만졌다. 수갑의 서늘한 촉감이 생경했다.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풀었다. 모래 주머니를 단 것 같은 발을 옮겼다. 515호. 낯설게 느껴지는 집공기를 들이마셨다. 출근한 지 열 시간 만에. 진짜 퇴근이었다.
침대 위로 엎어졌다. 호흡이 필요한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뻐끔거리길 반복했다. 공중에 말풍선처럼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의 직업을 알았는데도 개운치 않았다.
약점이 무기인 남자. 엄살 부리는데 항상 이기는 남자.
뒤척이던 한빈은 통 잠에 들지 못 했다. 가슴은 왜 그 모양이고, 어떤 여자를 만난 걸까. 어쩌면 영원히 궁금할 거라는 말. 예언일지 몰랐다.
그날 이후. 한빈은 생선 가게 드나드는 고양이처럼 그 남자의 집에 방문했다. 수염은 왜 매일 날까. 하루쯤은 거를 수 없는 걸까. 그의 환부가 나을 때까지, 그 너덜너덜한 가슴에 살이 돋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그를 돌보는 거라고. 어떻게 그걸 보고 지나칠 수 있겠냐고. 한빈은 퍽 생각했다. 젊고 기운 넘치고 순한 20대 남자로서. 약한 사람을 지나칠 수 없으니까. 다정하려 노력 따위 안 해도, 태생이 망가진 걸 지나치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런 것에 끌렸는지 모른다. 최초의 기억은 열 살. 가시 돋친 탱자나무를 사랑했다. 자기 가시에 짓물리고 눅진한 과육을 흘리던 탱자 열매. 가족들이 하나 같이 멍이 들었다 못생겼다 말 할 때, 가만히 서서 다친 탱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린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망가진 게 예뻐보였나.
-
한밤의 완차이역 에스컬레이터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수십 개의 머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상자처럼 오르내렸다. 맨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던 한빈은 무언가를 솎아내는 일에 열심이었다. 수많은 머리 속, 유달리 둥그렇게 솟은 머리. 불쑥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기척을 내지 않았다.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미행하는 기분으로 발을 굴렸다. 장하오가 멎은 곳에 따라 멈추어 섰다. 붉은 벽돌로 둘러 쌓인 중식당 앞. 등을 보인 그의 뒤에서 한빈이 냅다 소리쳤다.
우악!
짧은 중국어욕을 씹은 하오가 눈에 띄게 소스라쳤다. 가슴까지 부여잡았다. 뭐야! 나 놀라써. 모양 빠지게 벽에 주저앉으며 한 번 더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 진짜 놀라써! 헛것을 본 새끼강아지처럼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한빈이 헤실거리며 그를 일으켰다.
장하오 바보.
으으응 아냐 성한빈 바보야.
노천 식당엔 철 지난 유행가가 흐르고 있었다. 수초가 심긴 미니 수족관. 물비린내. 타일벽. 지저분한 소스통. 한빈은 냅킨을 집어들고 만지작거렸다. 하오의 눈치를 보며 재잘재잘 종알댔다.
다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홍콩에 온 건
어릴 때 비디오 가게를 하셨거든요? 처음 봤던 영화는 열혈남아였는데 하나도 이해 못했어요 아화가 버스를 떠나보내며 왜 우는지. 그때는 그냥 유덕화가 멋있어 보였어요! 사실 왕가위의 타락천사는 지금도 다 이해 못했구요 하지만 이해 못해도 아름답다는 건 알아요 이해하지 않아도 느끼는 걸 보면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감정 같기도 하구……
제가 방금 어디까지 말했죠?
한참 말을 쏟아내던 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어왔다. 자기가 하던 말을 까먹어놓고 히죽거리며 말을 돌렸다. 화제가 금방금방 바뀌었다. 하오는 묵묵히 경청하며 간간이 짧은 대답을 던졌고, 오랜 시간 턱을 괸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날들이 이어졌다. 시간이 쌓이며 차츰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졌다. 장하오가 한국 노래와 영화, 드라마까지 섭렵했다는 사실. 델리스파이스 소공연에 가고 종로 귀퉁이에서 첫눈을 맞는 게 소원이라는 사실. 그건 아마 그의 생애 첫눈이 될 거라는 사실. 한국에 너무 가고 싶어 운 적이 있다는 사실. 크리스마스를 연인과 보내본 적 없다는 사실.
사실은 꿈이 형사가 아니라 가수였다는 것. 순직한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어머니의 소원이었다는 것. 처음 형사가 되었을 때 참혹한 살인 현장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는 것. 어떤 날엔 꿈에서 시체가 말을 건다는 것. 그래서 악몽을 자주 꾼다는 것. 허밍을 지어 부를 때나 유덕화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 실력이 제법이라는 것.
구석구석 알게 되었다. 그의 독특함에 혀를 내두르는 날도 늘었다. 한날은 싸이월드 가입을 도와줬더니, 싸운 날에 미니미를 숨겨놓았다. 한국 노래에 머리를 털며 춤을 추다가도, 완창 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이 도시에 비가 처음 내리는 것도 아닌데, 천둥 치는 날엔 유달리 겁을 먹었다.
창틀에 빗물이 고였다. 한빈이 문을 닫았다. 텔레비전에선 금성무가 버스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쪽이 바닥에서 잘래? 내가 양보할게.”
“응?”
“원래 바닥이 시원해서 좋은데 내가 양보한다구.”
“난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 본 적 없어.”
“왕자님이야? 막 핍박 같은 거 받아본 적 없고 오냐오냐 개차반으로 자랐나?”
“마자. 나 핍박하기엔 너무 잘생겼자나. 그건 핍박하는 사람 손해야.”
“이야… 이거 진짜 제 정신 아닌 사람이네.”
한빈이 혀를 내둘렀다. 제대로 걸렸다, 걸렸어. 베개를 끌어안고 철제 프레임에 몸을 기대었다. 그 사람은 왜 너 같은 걸 만났지. 하오가 속마음을 읽은 듯 읊조렸다.
“나는 거절한다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잘난 척 그만해라 진짜. 누군 잘난 거 없는 줄 알아.”
“얼마나 잘났어? 말해줘. 나 듣고 싶어.”
“난 말보단 행동으로 하는 타입이거든.”
힘 되게 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빈이 불쑥 허공으로 다리를 뻗었다. 맥없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 하오가 가슴께를 끌어안고 신음을 흘렸다. 아아아아 아포. 어 또 케. 이제 나으려면 더 오래 걸려. 백 년 만 년이야. 바닥을 닦을 기세로 굴렀다. 이내 침대 위에서 말간 얼굴이 튀어나왔다. 한빈은 말없이 하오의 엄살을 관망했다.
무슨 엄살이 이래. 한빈은 속으로 야유 했지만 작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충동에 발을 담근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가도, 영영 아팠으면 좋겠다.
한빈이 어르듯 물었다. 많이 아파? 따듯하고 살벌한 웃음. 그의 등뒤로 벼락이 내리쳤다. 유리창이 깨질 듯 진동했다. 괘씸하리만치 묘한 장면에 하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생떼를 부렸다. 완전 아파. 그러니까 내 생일에 한국 데려가.
응?
비좁은 침대에 몸을 맞댔다. 잠든 모양인지 옆에서 미동이 없었다. 하오가 그의 힘빠진 손가락을 들었다.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잠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빈은 웅얼거렸다. 그래. 내일 주말이니까… 또 얘기 해. 몰래 그를 끌어안은 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웅. 아침에 나 면도도 해주구.
해가 빌딩숲 사이로 솟아올랐다. 한빈은 창문을 열었다. 창틀 너머로 전깃줄에 새가 앉아 있었다. 여기 있다고? 중얼거린 한빈이 철제 서랍 첫 번째 칸을 열었다. 서랍 속에서 손이 헛돌았다. 면도기 여기 있는 거 맞아? 다시 한 번 한빈이 소리쳤다. 안 보이는데? 그 순간 무언가가 손가락에 걸렸다. 여자 머리끈이었다.
……
한빈은 머리끈을 말없이 응시했다. 노란 별이 달린 머리끈. 성한빈이 아는 어떤 여자. 그 여자는 같은 립스틱, 같은 머리끈만 사용한다. 취향이 지겨우리만치 일관적인 그녀는, 전 연인을 닮은 사람을 찾아 헤맸다. 어떠한 직감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예감이, 간담을 훑는다. 순간 한빈의 고개가 돌아갔다.
장하오.
이름을 부르려는 그때. 유선 전화 벨이 울렸다. 한빈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샤워 부스 방향이었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찾았어? 장하오가 벽 너머로 조그맣게 얼굴을 내밀었다. 샤워 수전 소리가 들려왔다. 공중에 미지근한 수증기가 퍼졌다.
벨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찾고 있어. 가지고 들어갈게. 한빈은 기척을 죽이고 전화기를 들었다. 귀에 가져다 대자, 수화기 너머로 버스 경적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바짝 귀를 붙였다. 끝이 갈라지는 여자 목소리. 이또한 익숙하다. 이별을 통보 받던 그날의 횡단보도가 뇌리를 스쳤다.
─사형 받았어.
─나 이용해서 우리 오빠 감옥에 처넣으니까 살만 하니?
구불거리는 전화선을 붙잡았다. 손 끝에 힘이 실렸다.
─내가 왜 너 같은 놈한테 걸려서.
─미친년처럼 뭐 할 말이 있다고 또 전화를 하고.
자조적인 투로 중얼대던 그녀가 목소리를 떨었다.
─사랑할 자격도 받을 자격도 없는 나쁜 새끼. 적어도 난… 니가 그랬어도, 내가 너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그게 미안해서 이해하려고 해봤어. 그게 니 일이니까. 근데 지금 니 옆에 있는 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작게 욕을 씹은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넌 정말 너밖에 모르는 새끼여서 너 닮은 사람 사랑하는 거야. 문득 한빈의 시선이 올라갔다. 텔레비전 옆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이 비쳤다. 목덜미 늘어난 하얀 반팔. 메마른 얼굴.
─내가 지금 어딘 줄 아니?
멀리서 들리던 경적 소리가 점차 커졌다.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듯 스피커 너머로 굉음이 울려퍼졌다. 지하 깊숙이 숨어있던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기분. 한빈은 번뜩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한빈!
무얼 하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하오는 샤워 수전을 끄고 아래에 수건을 둘렀다. 젖은 머리칼을 털며 욱신거리는 옆구리 위에 손을 얹었다. 카펫을 밟던 그의 걸음이 멎은 건 순간이었다.
협탁 위에서 유선 전화가 비뚤게 누워 있었다. 다이얼 패드와 맞물리지 못한 수화기. 그리고 텅빈 침대. 하오가 고갤 돌렸다. 현관이 싸늘했다. 문득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방치한 병이 솟구치듯 등이 곱아들었다.
통증이 선명할수록 느릿하게 머릴 쓸어넘겼다. 협탁에 널브러진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한빈의 집문을 쾅쾅 두드렸다. 너한텐 그런 의도 아니었어. 해명할 기회 좀 줘, 제발. 물론 이상하겠지. 그 여자의 애인인 너에게 내가 다가갔으니까. 그런데 아니야. 관련 없어. 그 여자가 먼저 너에게 접근했을 뿐. 이 건물에 살던 것도, 문을 열고 들어가던 너를 본 것도, 그 여자가 눈치 챌 만큼 너한테 관심을 두던 것도. 다 나야.
어수선한 변명이 속에서 들끓었다. 현관문 너머는 고요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방음이 취약한 방안에선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버려진 척에 능했던 남자는, 그날 처음으로 버려졌다.
-
터번 쓴 인도인은 노점에서 짝퉁 가방을 팔았다. 종교인 같은 외양에 양심이라곤 없었다. 한국말로 '이쁜 짝퉁 이 만원'을 기도문 대신 외쳤다. 손가락으로 막 브이 표시까지 했다. 늙은이 아양에 한국 관광객들이 웃어재끼며 지갑을 열었다. 인도인에게 그들은 신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주면 누구든 신이 될 수 있었다.
손부채질 하던 인도인이 매대 앞을 서성대며 또 다른 신을 물색했다. 멀리서 한 남자가 눈에 든 건 그때였다. 장하오가 커다란 간판 아래를 거닐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하얀 얼굴. 기다란 목. 무례가 습관인지라, 지나가는 그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인도인 특유의 영어 악센트가 억셌다.
한국인이야?
아니.
중국인? 싸게 해줄 수 있는,
너 많이 해.
언뜻 울음을 참는 듯한 말투였는데 들여다보니 가관이었다. 물기 있는 눈가가 너절하게 짓물렀고 묘하리만치 온몸에 매가리가 없었다. 그 꼴이 퍽 미친놈 같았는지, 인도인이 상체를 뒤로 내뺐다. 이어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 보니 이 자식, 맨발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채인 발바닥이 죄 까져 있었다. 청바지 밑단은 흙투성이였다. 예수도 아닌데 거리를 맨발로 걷는다. 이상한 놈이었다.
인도인이 혀를 찼다. 허우대 멀쩡하다 못 해 딴따라를 해도 대성할 놈이. 어쩌다 이런 미친 짓을 하게 됐는지. 그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돌아와 물었다.
전화 쓸 수 있어?
전화?
애인을 찾고 있어. 돌아오면 가방 많이 사라고 할게.
액정이 요란하게 부서진 노키아 피처폰을 내밀었다. 전원이 나갔는지 화면이 꺼져 있었다. 아니면 지금 내가 살게. 짝퉁 가방 세 개를 매대 위에 탑처럼 쌓았다. 그 위에 지폐를 얹었다. 바람이 슥 끼치자 핏빛 홍콩 달러가 콘크리트 바닥으로 쏟아졌다. 하오는 주울 정신도 없이 멍했다. 그저 허락을 기다리는 개처럼 간절한 눈빛만 보내왔다. 돌아오는 게 맞긴 한 건지, 버려진 건지 몰랐다.
인도인이 난감한 얼굴로 어깰 으쓱였다.
우린 전화가 없어. 건널목 편의점에 가봐. 공중전화박스가 있어.
손가락으로 편의점을 가리키자 장하오의 시선이 딸려갔다. 청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돈을 더 쥐어줬다. 인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놈에게 돈을 받았다간 무슨 화가 생길지 몰랐다. 돈에 환장할지언정 그 정도 사리 판단은 됐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완강한 기세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던 인도인은 잠깐 있어 보라 손짓했다. 손때 묻은 천막 뒤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알파벳 엘 하나가 빠진 짝퉁 시계. 롤렉스도 아니고 로렉스였다.
가방말고, 이거 가지고 가.
…….
시간은 계속 나아가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거기까지 데려다 줄 거야.
이 남자는 지금 무언가 간절해 보였다. 그래서 시계였다. 장하오는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반팔 옷깃이 무더운 바람에 부둥켰다.
인도인은 제 손에 쥐어진 돈과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예수는 맨발로 거리를 돌아다녔고 붓다는 출가한 청년이었다. 그 역시 맨발로 집을 나왔고 거리를 떠돌며 일용할 양식을 주었으니 신은 신인데. 울면서 공중전화를 찾는 신은 처음 보았다.
침사추이에서 가장 슬픈 신이었다.
쓸쓸한 등에 인도인은 조용히 합장했다.
편의점 옆 빨간 전화부스. 그 안에 담긴 하오는 명함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주머니를 털어 동전을 쏟아 넣었다. 집에서 나서자마자 찾아간 경찰서에선 찾겠다는 말만 되풀이할뿐, 그를 미친놈 취급했다. 혀를 차고 한심한 시선을 보내왔다. 맨발로 울고 있는 놈을 정상으로 볼 리 없었다.
동전이 짤랑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허리를 웅크리고 주웠다. 받지 않는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는지. 스무 번 이후론 세지 않았다. 유리에 미끄러져 머리를 기댔다. 수화기에선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고 했다.
어디 갔어?
나 아프니까 들어와주라…… 응?
내 생일날 서울 가자며. 왜 거짓말 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마뼈에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힘을 잃은 눈꼬리에 물이 맺혔다. 눈물이 흰 뺨을 가로질렀고 습기 가득한 전화부스 위로 굵은 비가 내렸다. 유리벽에 탕 머리를 박자 목청을 긁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함께 한 약속들이 혀위를 굴러다녔다. 사방에서 따가운 소리가 났다. 제멋대로 왔다 가는 소나기였다.
부스 밖을 벗어난 그의 옷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그가 성큼 고개를 돌렸다. 함부로 젖는 건 싫다면서,
“어딨었어? 뭘 잘했다고 그러고 있어.”
엉망으로 젖은 성한빈이었다. 퉁명스런 투였지만 동시에 연민이 일렁이는 눈이었다.
“죄 씻으려구….”
볼품 없이 쪼그려 앉은 하오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한빈이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내장이 곪는 느낌. 그것을 다시금 느낀다.
“거짓말 하지 말고 직접 대답해.”
“응.”
“그쪽 이렇게 만든 게 내 전여자친구가 맞아? 나랑 그쪽 닮아서 그 사람이 나를 만난 것도 맞냐고.”
“맞아.”
“……난 뭐 어떻게 해야 돼. 등신 같이 놀아났는데.”
“등신 아니야.”
쏘아 붙이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하지만 눈앞이 흐렸고 목소리가 먹어 들어가기만 했다. 나한테 접근한 이유는 뭐야? 또 누구 잡아처넣으려고? 아님 난가? 죄 없는 사람도 괴롭혀? 너한텐 그런 거 없어. 그 말을 믿으라고?
“그냥 지나가지 그랬어. 상점에서, 복도에서. 나 모른 척 하지, 아는 척 하지 말지.”
“너랑 운명이 되고 싶어서.”
“뭐?”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니까.”
“그게 무슨 운명이야.”
“이런 거밖에 할 줄 모르는데 어떡해.”
“…….”
“나 너무 나쁘고 바보니까 그냥 죽을까?”
“장하오.”
“그 여자 만나기 전에 너 몰랐으니까. 나 바보니까….”
하오가 말끝을 뭉갰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 걸까. 웃음기 머금은 얼굴, 종알대던 입술, 지그시 바라보던 눈짓. 그런 것들은 다 사라져버렸다. 시간과 함께 영영 어디론가 가버렸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한빈은 무감하게 뇌까렸다. 죽지 마. 아프지도 말고. 허공을 응시하던 하오는 헛웃음을 뱉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이 너무 아파서.
“사람이 죽었어. 내 연인이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됐어.”
한빈의 손에 들린 종이가 차츰 비에 젖어들었다. 비행기 모양이 그려진 종이였고 도착지는 서울. 단 한 장이었다. 하오는 그의 손을 응시하다 눈길을 거두었다. 잘못했어. 작게 중얼거렸다. 엇갈리고 왜곡된 관계의 종말이 오고 있었다. 슬픈 눈이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이따금 창 너머로 천둥번개가 쳤다.
불 꺼진 방안은 고요했다. 문 하나를 벽처럼 사이에 두고 둘은 적막을 끌어안고 있었다. 제 각기의 허무를 삼키며. 어항 속 금붕어는 물살을 가르다 말고 좁은 유리벽에 툭툭 부딪쳤다. 한 마리가 벽을 박기 시작하자 다른 금붕어도 덩달아 박아버렸다. 얘네들은 이게 벽이라는 걸 알까. 벽 앞에서 평생 서로가 다치는 걸 봐야 할 터였다. 벽이 자신들을 가로 막는 것도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면서.
벽에 머릴 기댄 한빈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돌아가고 싶어.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는 말을 덧붙이길 유보했다. 사실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조차 모호했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다시 그곳까지 데려다 줄까. 그녀의 전화를 받기 전으로, 장하오를 만나기 전으로.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수갑처럼 차가운 메탈이 손목을 감고 있었다. 하오가 내민 로렉스. 짝퉁 시계 시침이 시간을 선회한다.
반대편에서 물끄러미 천장을 보던 하오가 시선을 떨구었다.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실링팬, 씨디 플레이어, 커튼, 성한빈. 이름은 살아있는 한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흔적. 시간이 지나도 남는 유일한 지표. 세상에 단어가 오직 하나라면 그게 네 이름이길 바란다. 그럼 네가 없는 곳에서도 너를 볼 수 있어.
붙잡아도 흐르는 시간처럼 성한빈은 떠난다. 장하오는 그의 명확한 도착지를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연습이다.
돌아가자. 나지막한 목소리에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머릿속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의미는 만들면 되니까.
“이웃집인데요. 우리 본 적 있지 않나.”
520호에 사는 남자는 말한다.
“아니, 처음 보는데.” 한빈이 자신도 모르게 대꾸한다.
이웃이니까 물어볼게요. 눈 오는 종로에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해석해야 되는 남자가 허밍처럼 읊조렸다. 한빈은 대답 없이 빗줄기가 흐르는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의미 없이 희망적인 말에 웃음을 삼키면서. 말의 의미를 영원히 궁금해 하면서.